한국 배터리 업계가 제대로 허를 찔렸다. 미국 완성차 업체 포드가 세계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 닝더스다이(CATL)와 손잡고 미국에 공장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미국 정부가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시행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도 교묘히 피했다.
IRA의 수혜를 입을 것으로 기대하며 미국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던 한국 배터리 업계는 당혹스럽다는 반응이다.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입장이지만, 좋은 소식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중국 업체에 점유율로 밀리고 있는 가운데 북미 시장을 중심으로 반등할 기회마저 잃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내수 시장을 중심으로 성장했던 중국은 최근 본격적으로 세계시장을 공략하며 ‘배터리 굴기’를 꿈꾸고 있다. 중국 정부는 배터리 기업에 대해 세제 혜택과 보조금 등을 지급하며 지원사격에 나섰다.
한국 정부도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다. 2021년 발표한 ‘K-배터리 발전전략’을 통해 2030년까지 40조 원 이상을 투자해 연구개발과 세제 혜택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업계 반응은 미온적이다. 최근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가 발표한 보고서는 국내 배터리 3사가 현 수준의 점유율을 유지하려면 연간 100억 달러(약 12조 원) 규모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연간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국내 3사의 점유율은 약 24%였다. CATL, BYD 등 중국 기업 6곳의 점유율을 합하면 약 60%다. 중국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배터리 업계 한 관계자는 “배터리 업계에 대한 지원은 중국과 비교하면 게임이 안 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업계는 배터리 소재 공급망 다변화에도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IRA 시행에 따라 배터리 소재에 대한 중국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각 배터리 기업들이 소재 공급망 다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민간 주도로는 역부족이다. 각국의 자원 보호주의가 심화되고 있는 만큼 정부 차원에서 나설 필요가 있다.
배터리 산업은 ‘제2의 반도체’로 불릴 만큼 한국 경제의 미래 먹거리가 될 수 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전기차 배터리 시장이 아직 태동기라는 것이다. 배터리 산업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정부와 기업의 ‘원팀’ 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