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한 거북이가 나태한 토끼를 이기는 이솝우화 ‘토끼와 거북이’는 성실성 앞에 재주가 당할 수 없다는 교훈을 준다. 워낙 대중적인 우화인 만큼 수많은 파생본과 해석이 나왔다. 그중 유독 기억에 남는 버전이 있다. 재시합을 하는 토끼가 경주에서 이제는 낮잠을 자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태생적으로 불리한 거북이는 앞으로 모든 경주에서 100%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부의 거북이 행정이 한국 반도체 산업을 세계 시장에서 이길 수 없는 거북이로 만들고 있다. 2019년 부지를 선정했던 SK하이닉스의 경기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첫 삽조차 뜨지 못했다. 산업단지계획 승인에만 2년이 걸리는 등 관련 절차들이 미뤄졌기 때문이다. 운영에 필요한 용수공설을 끌어오는 데도 지자체 인허가 문제에 부딪히며 6개월이 걸렸다. 착공 예정 시기가 또 내년 상반기로 연기되면서 부지 선정 이후 6년이 지나야 결국 시작 단계에 들어선다.
토끼의 사례를 보자. 삼성전자가 2021년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 제2파운드리 공장 신설을 발표했을 당시, 테일러 시의회는 단 2개월 만에 관련 조례를 의결하고 통과시켰다. 일본 구마모토현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 대만의 파운드리업체 TSMC 역시 통상 5년이 소요되는 공사 기간을 일본 정부의 도움으로 2년가량으로 줄였다.
반도체 생산의 핵심 재료로 여겨지는 ‘초순수’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초순수는 공정 난이도 탓에 미국, 일본, 프랑스 등 극소수의 국가만 생산할 수 있다.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최근 환경부는 450억 원을 투입해 초순수 생산기술 자립화 사업에 나서기로 했다.
그러나 초순수 수질분석, 기술개발, 실증·검증 및 교육시설 등이 집적화된 플랫폼 센터는 2030년에야 조성될 예정이다. 그간 비슷한 사업이 차일피일 미뤄졌음을 고려할 때 이 또한 장담할 수 없다. 최근 만난 초순수업계 관계자는 “국산화 목표가 2025년인 만큼, 플랫폼 센터 준공 역시 앞당겨야 하는데 답답하기만 하다”고 토로했다.
시장에서는 올해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을 담당하는 DS(디바이스솔루션) 부문과 SK하이닉스가 모두 적자로 전환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미국, 대만 등을 토끼로 가정한다면 한국은 평생 ‘느릿느릿 행정’이라는 태생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가진 거북이로 남을 수밖에 없다. 거북이가 자신의 노력만으로 토끼를 이기는 시대는 갔다. 정부는 알까. 요즘은 속도 빠른 토끼들이 성실성까지 가졌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