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빠의 순수한 팬심을 마주한 순간. 예매할 때부터 들떠있던 아빠는 영화관에 들어설 때까지 내내 상기돼 있었습니다. 첫 장면부터 탄성을 내뱉더니, 중간중간 들썩였고, 영화 마지막에는 결국 눈물까지 보였죠.
‘무엇이 그를 감동 시켰나’라는 질문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내 눈에도 똑같이 눈물이 흘렀기 때문이죠.
26년 만에 극장판으로 돌아온 ‘더 퍼스트 슬램덩크’ 이야기입니다. 12일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4만 7241명의 관객을 모아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했죠.
슬램덩크는 1990~1996년 일본 만화 잡지 주간 소년챔프에 연재된 인기 만화로, 누적 발행 부수만 1억2600만 부를 넘긴 대작입니다. 한국에서는 1992년 12월 만화 출판사 대원 C.I.를 통해 번역본이 출판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마지막 31권(1996년 10월 발매)을 포함한 총 판매량은 1450만 부 이상이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1998년 6월부터 1999년 3월까지 SBS에서 방영된 TV 애니메이션 버전의 인기도 엄청났는데요. 슬램덩크는 1990년대 국내 농구 붐을 일으킨 주역이란 평가를 받습니다. 한국 프로농구리그 탄생 이유 중 하나가 ‘슬램덩크’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1990년대 당시 ‘슬램덩크’에 열광했던 세대들이 지금 영화관에 모였습니다. 당시 유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슬램덩크는 추억이자 향수입니다.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가게 해주는 치트키죠.
그들의 변함없는 모습도, 또 잊고 있었던 감동도, 다시금 깨어나게 해주는 선물이 됐는데요.
‘슬램덩크’ 만화와 TV 애니메이션이 방영될 당시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기 전이라 일본식 이름과 지명을 쓸 수 없었죠. 그렇기에 등장인물의 이름과 학교, 지명 모두 한국식으로 바꿨습니다.
주인공들이 다니는 고등학교는 쇼호쿠 고등학교에서 한자음을 그대로 딴 ‘북산 고등학교’로 말이죠. 등장인물 이름 또한 강백호, 서태웅, 채치수, 정대만, 송태섭 등으로 바꿨는데요. 이후 문호가 개방된 후에도 국내에선 일본식 이름이 아닌 한국식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를 반영해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자막과 더빙 모두 지명과 이름 한국판을 기본으로 했는데요. 향수를 해치지 않은 배려심 있는 자막이었죠.
그 당시 ‘슬램덩크’를 기억하는 뜨거운 이들도, 이번에 처음 마주한 이들을 바라본 이들도 감탄하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 원작의 2D 그림에 3D CG 파스텔톤 애니메이션이 묘하게 결합한 이질감 없는 3D 애니메이션으로 돌아온 캐릭터들에 대한 반응도 뜨거운데요.
일본 랭킹전문 사이트 ‘모두의 랭킹’에서도 영화 개봉 기념으로 ‘최애 캐릭터 랭킹’ 조사를 했습니다. 랭킹 10위권의 등장인물 중 8명이 바로 북산고 멤버였죠.
1위는 정대만이 차지했는데요. 메인 캐릭터로 분류되는 강백호와 서태웅을 이긴 결과였죠. 이는 메인 캐릭터를 뛰어넘는 서사 때문이기도 합니다. 중학교 시절 슈퍼플레이어였던 정대만은 무릎부상으로 사기를 잃고 불량학생의 길을 걷는데요. 그래도 그 마음속 깊이 박혀있던 농구를 외면할 수 없었죠. 북산고 감독 안 선생님을 만나자마자 “농구를 하고 싶어요”라는 명대사를 내뱉으며 다시 농구선수의 길을 걷는데요. 코트에 정식으로 발을 붙인 정대만이 그간 기른 장발을 싹둑 자른 모습도 명장면으로 꼽히죠.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그려진 산왕공고전에서도 정대만의 유명한 대사가 언급되는데요. 산왕공고는 정대만을 봉쇄하기 위해 애쓰고, 정대만은 이에 고전합니다. 유달리 지친 정대만의 모습이 비치는 절망의 순간. “그래 난 정대만, 포기를 모르는 남자지”라고 내뱉으며 멋진 3점 슛을 성공시키는데요. 그때 정대만의 모습은 그저 빛. 후광이 절로 비치죠.
2위는 빨간 머리 천재 강백호입니다. ‘슬램덩크’의 실질적인 주인공인데요. 첫눈에 반한 채소연(북산고 주장 채치수 여동생)이 “농구 좋아하세요?”라고 묻자, 바로 농구부로 향합니다. 그저 사랑 때문에 농구부에 들었지만, 그는 진짜 천재(?)였는데요. 순발력도 좋았고 강력한 힘과 점프력으로 북산고 농구부와 안 선생님의 마음에 들죠. 귀도 매우 가벼운데요. 칭찬해주고 띄워주는 말을 하면 곧바로 몸이 움직이는 가벼운 발걸음도 매력 포인트입니다. 채치수가 말한 “리바운드를 제압하는 자가 시합을 제압한다”는 말에 혹해 리바운드 연습에 열중하기도 하죠.
산왕공고 전에서 강백호의 명대사는 폭발하는데요. 등 부상으로 교체당한 강백호가 다시 코트에 복귀시켜 달라고 요구하며 안 선생님에게 “영감님(안 선생님)의 영광의 시대는 언제였죠? 난 지금입니다”라는 말을 내뱉죠. 강백호의 굳은 의지를 보여준 말이었는데요. 강백호는 결국 코트로 나서고 마지막 버저비터 슛을 날리며 “왼손은 거들 뿐”이란 말로 멋지게 마무리하죠.
9위에 오른 안 선생님도 빼놓을 수 없는데요. 북산고의 감독이자 모든 선수의 정신적 지주죠. 천방지축 강백호도 불량학생의 길을 걷던 정대만도 농구 코트에 돌아오게 한 마성의 인물인데요. 모든 일에 천천히 느린 듯한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하지만, 선수들에게 건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저 교훈이죠.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종료예요”라며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웠던 장면은 감동으로 꼽힙니다.
10위권 중 타 고교 선수는 단 2명 상양고 포인트가드 김수겸과 산왕공고 윤대협입니다. 이들은 각각 8위와 5위를 차지했는데요. 윤대협은 이번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요인물이기도 합니다. 천재적인 농구 센스와 잘난 얼굴을 자랑하는 윤대협은 북산고 선수들이 이기고 싶은 존재인데요.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메인으로 나서는 송태섭이 특히 자극을 받는 인물이죠. 뛰어난 능력 덕에 자신에게 맞서는 상대에 “죽도록 연습하고 와라! 날 쓰러뜨릴 생각이라면…”이라는 그저 놀라운 멘트를 하기도 합니다.
이번 영화는 ‘북산고 대 산왕공고’전을 담았는데요. 한국팬들이 특히 열광하는 부분입니다. 만화 연재가 끝나기 전 TV 애니메이션이 먼저 끝난 탓에 이 경기를 포함해 만화의 결말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지 못했기 때문인데요.
산왕전에서 서태웅의 패스를 받은 강백호가 버저비터 골을 넣으며 앙숙인 두 사람이 손을 마주치는 부분을 실제로 목도했죠. 이 장면을 영화관에서 마주할 수 있다니 그저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이유인데요.
꼭꼭 숨겨두었던 아지트 속 보물상자를 발견한 이 기분. 이 보물상자를 그 시절 친구들과 자녀들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더 따뜻하게 다가오는데요. “고마워요 슬램덩크”라는 고백을 그저 내뱉게 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