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딸이 뭐? 칭찬이야? 벼슬이야? 당신 '고명'이 뭔지 몰라?"
"아, 왜 몰라 알지. 떡국이나 갈비찜 같은 데 올라가는 예쁜 계란 지단 같은 그런 거."
"그럼 그게 무슨 뜻이겠어? 아버지한테 메인 디시는 오빠들이다. 너는 딸이니까 그냥 구색 맞추기 장식용으로 만족해라. 지금 경고하시는 거잖아."
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TV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대사 중 일부다. 실제 '고명딸'이라는 단어는 음식에 맛을 더하고 모양과 색을 돋보이게 하는 고명처럼, 여러 아들 사이에 예쁘게 얹혀 있어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뜻이다. 언뜻 들어보면 딸을 귀하게 여기는 말 같지만 속뜻을 들여다보면 딸은 양념이나 고명처럼 구색 갖추기로만 끼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내가 고명이 아닌 메인 디시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겠다"는 다짐에도 '고명딸' 진화영은 단 한번도 경영다툼에서 주도권을 잡지 못한채 드라마는 끝이 난다. 드라마의 배경이 1980~1990년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꽤 자연스러운 설정이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다. 최근 단행된 재계 사장단 인사에서 여성 CEO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타 업권에 비해 보수적이라는 금융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말에는 여성 은행장이 탄생하기도 했다. 강신숙 Sh수협은행장이 그 주인공으로, 강 행장은 권선주 전 기업은행장과 유명순 한국씨티은행장에 이어 3번째 여성 은행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진짜 변한걸까. 지난해 부터 이어진 금융권 CEO 및 임원 인사에서 강 행장을 제외하고는 '여성' CEO나 임원을 찾기는 그야말로 모래밭에서 바늘찾기다. 4대 은행 중에서는 유일하게 하나은행에서만 여성 임원이 배출됐다.
이같은 인사와 관련해 한 은행권 관계자는 "그간 볼 수 없었던 복합 위기로 불확실한 경영여건이 예상되고 있어 검증된 인사들을 위주로 안정적인 경영에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 치 앞을 예상하기 어려운 경제 상황 속 위기 극복이 최우선 과제가 된 경영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다. 문제는 최근 수 년간 4대 시중은행의 전체 임원 중 여성 임원 비중이 줄곧10%를 밑돌았다는 점이다.이는 곧 여성 은행원들이 위기 상황이든 아니든 경영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얻지 못했다는 점을 방증한다.
십 수년간 금융권에서는 이른바 '유리천장'을 깨뜨리자며 목소리를 높여왔다. 금융지주사들도 여성 임원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까지 가동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리천장'은 견고하다.
단순히 남녀간 평등을 위해 여성인력 양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간 수 많은 연구결과와 기업 사례들은 여성 인력 확대가 이사회의 다양성과 투명성을 높이고 재무적 성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고 있다. 이에 세계적인 투자자본들은 이제 주요 투자조건으로 이사회의 다양성을 고려하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이사회 다양성 비율이 30%를 넘는 기업만 투자하겠다고 구체적으로 기준을 밝히기도 했다.
우리 금융산업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인 것이다. 더 이상 임원 인사때마다 '여성'을 세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