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올가을 먼저 터진 단기금융시장, 신용 채권시장만이 유동성 문제를 안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대형 시중은행(금융지주)들 역시 유동성 위험에 취약한 것은 매한가지다. 정책금리 상승으로 내년에도 예금금리 상승이 지속된다면, 변동금리 대출금리가 오르면서 기업(자영업자 포함), 가계의 신용위험으로 번질 수 있다. 은행 신용 손실규모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뱅크런이 일어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은행마저 무너지며 경제·금융위기가 올 것이다.
유동성 위기 징후는 이미 7월부터
많은 이들은 10월 고조됐던 은행의 일시적 유동성 위기와 과도한 예금금리 경쟁 이유가 은행채 발행을 제한한 금융당국의 개입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은행 유동성 위기 징후는 금융당국의 은행채 발행 자제주문 한참 전인 7월부터 있었다. 정책금리 인상 영향으로 정기 예·적금금리가 오르면서 금리인상 수혜를 못 받는 요구불예금에서 자금유출이 확대되면서부터다.
문제는 최근 빠르게 발달한 핀테크(디지털금융) 영향으로 특히 10월, 은행권 전체 예금수신 포트폴리오 재조정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뤄졌다는 점이다. 그 결과, 정기 예·적금금리가 정책금리 상승분을 크게 초과해 비정상적으로 급등했다. 치솟은 금리 덕분에 시중자금이 은행권으로 몰리면서 은행권 유동성은 풍부해졌으나 2금융권은 유동성 고갈에 처하게 됐고, 예·적금금리에 직접 영향을 받는 변동금리 대출금리가 가파르게 치솟으면서 변동금리 대출자는 신용위험에 노출되게 됐다. 그렇다고 은행권을 유동성 위험에 취약하게 만든 주범이 핀테크 확산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원인은 좀 더 구조적인 데 있다.
미국 은행 사례를 보자. 한국보다 더 높고 급격한 정책금리 인상을 추진한 마국에서 한국처럼 예금시장, 금융시장 불안 등 유동성 위험이 수면 위에 드러났다는 보도는 없다. 미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배경엔 우리 국민들보다 미국 소비자들이 인터넷을 활용한 금융정보 접근성이 떨어지고 핀테크에 덜 노출되고 덜 보급된 것도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국내 은행들과 달리 미국 은행들은 조달수단으로써 예금·은행채 같은 단기성 재원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美 은행 자산유동화 통해 자금조달
미국은행들은 예금·은행채 외에 중요한 자금조달 수단을 하나 더 갖고 있는데, 바로 자산유동화다. 이것은 금번 레고랜드 사태의 매개체가 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같은 유동화자산(대출채권)과 유동화증권 간 만기가 불일치하는 편법적 단기 자산유동화가 아닌, 만기를 일치시키는 안정적 장기 자산유동화다. 자산유동화가 조달수단의 한 축을 형성하는 미국 은행들의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은 국내은행들보다 월등히 높다.
미국은행은 전체 자산 중 상당 규모의 자산을 유동화해 공급한다. 바로 이 자산이 미국의 주택대출인데, 이 대출의 대부분(90%수준)이 우리나라 주택금융공사의 보금자리대출과 같은 순수 장기고정금리 분할상환 형태다. 이 대출은 예금이나 은행채가 조달재원이 아니고, 전액 자산유동화를 통해 조달된 자금으로 공급된다.
적어도 주택대출같이 대출 회수기간이 긴 장기대출은 미국은행처럼 유동성 위험에 노출이 없도록 자산유동화, 즉 장기 유동화채(MBS, 커버드본드) 발행으로 조달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은행 입장에서는 총 조달수신 중 중도인출 편이성과 차환위험이 높아 유동성 위험노출이 큰 정기예금, 은행채 같은 단기 재원 의존도를 줄일 수 있다.
자연스럽게 금리 위험회피가 가능해져 소비자들에게 순수 장기 고정금리대출을 공급할 수 있게 돼 가계부채 구조개선도 도모할 수 있다. 보통, 이런 장기 유동화채 투자자들은 납입자들에게 장기적으로 연금을 계속 지급할 의무가 있는 연기금, 보험 등으로 단기간에 투자금을 회수(자금 인출)할 유인이 적다. 인구고령화로 이런 은퇴자금 시장은 커지고 있고, 이 시장은 안정성이 높은 장기투자 상품을 필요로 한다.
대증요법 아닌 시스템 개선 필요
정치권과 금융당국은 은행권에 예금금리를 올리지 마라, 대출금리를 올리지 마라 또는 안심전환대출을 해라 등 대증요법적 주문으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 국가경제와 금융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은행의 유동성 위험 완화를 목표로 구조적인 시스템 개선을 도모하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금번 위기가 잦아들면, 즉 채권시장 신용 스프레드가 본격적인 하향 안정세로 접어들면, 은행 주담대는 자체 장기고정금리 주담대 중심으로 취급하고, 이를 커버드본드 등을 활용한 은행 자체 자산유동화를 통해 공급하는 시스템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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