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전 직원들에게 당부했다. 직원들도 서로를 보며 “오늘은 푹 쉬어”라고 말하고 파이팅을 하기도 했다. 매년 65세 이상 어르신 독감 접종이 시작되는 날이면 나도 직원들도 잔뜩 긴장한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무료 접종이 시작되기도 전인데 독감 백신 접종을 하러 오시는 분들도 계시고, 며칠 안 남았으니 그냥 놔 달라는 분들을 잘 달래서 돌려보내기도 한다. 접종이 시작되는 날이면 병원 문을 열기 전인데도 어르신들이 일찍부터 나와 기다리고 계신다. 제시간에, 아니 그것보다 더 일찍 출근했음에도 왜 이렇게 문을 늦게 여느냐는 분도 계시고 내가 제일 먼저 왔다고 몇 차례나 언질을 주는 분도 계신다.
한꺼번에 어르신들이 몰리는 것을 막고자 75세 이상에서 먼저 접종을 시작하고 한 주 뒤에 65세 이상 어르신들이 백신을 맞게 된다. 75세 이상에서는 예진표 작성이 쉽지 않다. 주소가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에 그냥 알아서 쓰라는 분도 계시고 주민등록번호와 휴대폰 연락처 작성에도 진땀을 뺀다. 그렇게 어르신 독감 접종을 시작하는 날이면 다른 환자는 거의 못 보고 원장과 직원들이 접종에만 달라붙어 일한다. 시장통 같은 병원 대기실이 정리되고 점심시간이 되면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밖에 나가 점심을 사 먹을 시간도 여력도 없어 늘 중국집 자장면과 짬뽕, 탕수육을 시켜 함께 먹는다. 마치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난 전우들이 배식을 받아먹는 기분이다.
실제로 지금과 같은 대규모 독감 백신 접종은 2차 세계대전 미국에서 시작됐다. 스페인독감으로 알려진 1918년 인플루엔자 대유행은 몇 개월 사이에 2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1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미국은 5만 명의 미군을 잃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미국은 진주만을 침공한 일본과도 싸워야 했지만, 겨울을 앞두고 또다시 올지 모르는 인플루엔자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을 치르는 한편 생소한 바이러스와도 전쟁을 벌여야 했다. 미 육군의 전폭적 지원으로 미시간대학의 토머스 프랜시스와 조너스 소크가 최초의 비활성화 독감 백신을 개발하였다. 개발된 백신은 1942년 가을 엘로이즈 정신병원과 입실란티 주립병원 두 병원에서 8000명의 정신과 환자를 대상으로 접종했다. 안정성과 효과를 보기 위해서였다. 자발적이지도 않았고 본인의 동의도 없이 진행된 연구였다. 지금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그 당시에 신약은 그렇게 연구가 되었다. 안정성과 효능을 입증한 미 육군은 1945년 가을 전 장병들에게 독감 백신 접종을 명령했고, 그해 유행한 독감에서 예방접종을 받은 군인 중 8%만이 병에 걸렸다. 태평양 전쟁뿐 아니라 독감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한 것이다.
올겨울 독감도 유행하고 코로나 7차 유행도 함께 올 수 있다고 한다. 이 겨울에 또 한 번 전쟁을 치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에겐 백신이라는 무기가 있으니 겨울이 오기 전에, 독감이 기승을 부리기 전에 어르신뿐 아니라 많은 분이 백신 접종을 마치길 바란다.
조석현 누가광명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