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팅팅 부은 친구를 보고 나무라려는데, 회사 옆자리 선배도 같은 얼굴로 아침 인사를 건넵니다. 네 둘 다 같은 병이거든요. 요새 열의 일곱이 앓고 있다던 ‘환승연애 과몰입병’이죠.
어떤 날은 해은♡현규를 응원한다더니 갑자기 해은언니는 규민을 잊지 못했다며 언니 뜻대로 하라고 돌변해 돌아온 친구. 대체 어쩌라는 건지. 암호 같은 애정전선을 주입하는 친구에게서 벗어나고픈 데 돌아서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과몰입러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논리로 무장해도 먼저 쪽수(?)에서 밀리거든요. 그저 조용히 이 또한 지나가는 바람이려니 생각하고 무념무상의 얼굴로 있을 뿐인데요. 그런데 이 바람은 심상치가 않습니다.
환승연애는 TVING 오리지널 예능으로 2021년 6월 ‘환승연애’, 2022년 7월 ‘환승연애2’가 방영이 됐는데요. 다양한 이유로 이별한 커플들이 한 집에 모여 지나간 연애를 되짚고 새로운 인연을 마주하며 사랑을 찾아가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입니다. 전남친과 전여친이 마주하는 자리라는 파격적인 콘셉트가 화제였는데요. 회차가 진행되면서 X를 선택할지 새로운 사랑을 선택할지 출연진들의 흔들리는 심리전쟁에 시청자들의 마음까지 움직였습니다.
‘환승연애’의 큰 인기에 힘입어 방영한 ‘환승연애2’는 전작을 넘어섰죠. TV 예능과 OTT 예능을 동일 선상에 둔 화제성 조사(출처:굿데이터코퍼레이션)에서 ‘환승연애2’는 1위를 차지했습니다. OTT 서비스 내에서만 방영되는 프로그램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인기인데요.
그래서일까요? 트위터, 인스타그램뿐 아니라 유튜브 곳곳에서 ‘환승연애2’ 알고리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한 번도 내 의지대로 검색해 본 적도 클릭을 해본 적도 없는데 피드에서 떠나질 않는데요. 그래서 알게 됐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그들의 이름을 말이죠.
해은, 현규, 규민, 나연, 희두, 나언, 지연…. 그 수 많은 미끼 중 결국 하나를 눌러보셨다면 이미 반쯤 넘어간걸 테죠. 같은 ‘과몰입러’로 전도(?)하고자 하는 손길은 너무나 친절하거든요.
근데 문제는 연예예능이 ‘환승연애2’ 뿐이 아니라는 건데요. 그야말로 일반인 연애 예능의 홍수입니다. 앞서 ‘환승연애2’가 1위를 차지한 화제성 부문에서 ENA PLAY의 ‘나는 SOLO(나는 솔로)’, MBN ‘돌싱글즈3’, 웨이브 ‘남의 연애’도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는데요. 과거 연예인이 등장하는 연애 예능이 화제였던 2000년도 초반과 다르게 ‘가짜’ 아닌 ‘진짜 연애’를 일반인을 통해 지켜보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 다양한 연애물 중에서도 수요는 나뉘는데요. 옛사랑의 애틋함과 추억, 그 가운데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과의 썸. 여러 마음의 깊이감, 온갖 망상으로 이끄는 예능이 ‘환승연애2’라면 어른(?)들의 화끈한 연애를 보여주는 ‘돌싱글즈3’도 있죠.
전남친, 전여친을 넘어 ‘한번 다녀온’ 매력 만점 이혼 남녀들의 연애와 동거를 다룬 프로그램이어서일까요? 해당 프로그램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의 심의대상에 올랐는데요.
8월 방송된 9화에서 남녀 출연자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노천탕에서 입맞춤하고 껴안는 등의 진한 스킨십을 나눴는데요. 두 사람은 “(수영복 끈) 잘 묶였어?”, “풀어?” 등의 도발적인 대화가 이어지기도 했죠. 해당 장면은 여러 커뮤니티에서 회자됐는데요. “이게 연애지”, “너무 선정적이다” 등의 극과 극 반응으로 더 뜨거워졌습니다.
‘나는 SOLO(나는 솔로)’는 또 특이한 방향으로 시청자들을 끌어모으고 있는데요. 일반인 연애 예능의 날것 사파리라고 불립니다. (모든 일반인 대상 연애프로그램이 그렇겠지만) 관종 가득한 곳에 떨어진 빌런들의 왕위 쟁탈전(?) 같은 느낌이랄까요.
서로의 썸도 썸이지만, 다양한 인간군을 마주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김치찌개에 김치를 넣었냐 안 넣었느냐로 싸운다든가, 분명 나에게 마음이 있으면서 여기저기 찔러본다고 여자를 질책하는 빌런도 등장하죠.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구나 싶은 묘한 막장 스멜이 시청자를 끌어들입니다.
이외에도 ‘핑크라이’, ‘나는 SOLO 그 후, 사랑은 계속된다(나솔사계)’, ‘러브캐처 인 서울’, ‘체인리액션’, ‘이별도 리콜이 되나요’, ‘체인지 데이즈 시즌2’, ‘사내연애’, ‘솔로지옥’, ‘남의연애’, ‘각자의 본능대로’, ‘연애는 직진’, ‘러브마피아2’, ‘나대지마 심장아’, ‘메리퀴어’, ‘홀인러브’, ‘파트너 게임’ 등 엄청난 종류의 연애 예능이 가득한데요. 본인이 끌리는 나이, 직업, 취향을 골라 영상을 선택할 수도 있죠.
문제는 이런 연애 예능에 1도 관심이 없는 이들은 정말 ‘볼 게 없는’ 요즘이라는 겁니다. TV를 틀어도, 유튜브를 틀어도, OTT를 틀어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반인들만 잔뜩 등장하는 연애 얘기뿐이죠.
남의 연애엔 관심도 없는 데다 이미 헤어진 사람들이 나와서 후회하고 울고, 서운해하는 모든 과정이 전혀 이해가 되질 않는데요. 거기다 그걸 굳이 전국에 ‘공개’하는 행태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근데 이런 생각이 소수란 생각에 더 작아지는데요. 내 옆자리 후배도, 내 절친도, 구독 중인 유튜버도 죄다 ‘환승연애2’ 과몰입러 투성이거든요.
7일 공개된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MMTG’에서는 진행자 재재와 세븐틴 승관, 비비지 신비·엄지, 아스트로 문빈이 나와 ‘환승연애2’ 마지막회 단관을 했는데요. 연예인들까지 푹 빠진 연애 예능이라니 이 엄청난 어색함에 세상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기분이죠. 폭풍 오열을 하는 연예인과 스태프를 바라보며 그저 이 또한 지나가기를 바랄 뿐인데요.
하지만 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환승연애3’가 제작확정 돼 내년 하반기 진행된다고 하는데요. 연애 예능 ‘무관심러’들의 힘겨운 버티기는 내년에도 계속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