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식어버린 '한국의 용광로' 이태원

입력 2022-11-04 06:00 수정 2022-11-0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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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부 기자

이태원은 '한국의 멜팅팟'으로 불리기 손색이 없었다. 6·25 전쟁 직후 미국인을 비롯해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면서 다양한 문화와 행동양식, 가치관이 어우러졌다. 여러 삶의 방식이 공존한 덕에 이태원은 사회 소수자도 맘 놓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고,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용인과 배려로 다양성을 꽃 피운 이태원이 점차 시들고 있다. 이번 참사가 이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거리에서는 상식과 비상식이 교차했고 이타주의와 이기주의가 공존했다. 특히 의사결정 책임자들은 시민이 일군 '한국의 멜팅팟'을 지키기는커녕 사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현장 경찰의 지원을 뭉갠 윗선의 안일한 대응, "할 만큼 했다"는 박희영 용산구청장, "소방ㆍ경찰 인력을 미리 배치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라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발언은 공직자 자질마저 의문을 품기에 부족함이 없다.

경찰과 지자체 대응 등이 참사의 첫 번째 원인이겠지만, 미숙한 시민의식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에도 지나갈 길을 뚫는다며 앞사람을 미는가 하면 참사가 벌어진 뒤 출동하는 구급차를 바라보며 춤추는 이들도 있었다. 사고 현장을 바라보며 시시덕거리는 장면도 고스란히 담겼다. 위기의 순간, 지나가는 사람의 손을 잡아 난간 위로 끌어올리며 연대하고, 참사 현장에 뛰어들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쓰러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제 숨을 불어넣는 시민들과 대비됐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가 1862년 출판한 소설 '레 미제라블'에는 "큰 실수는 굵은 밧줄처럼 여러 겹의 섬유로 만들어진다"는 문장이 나온다. 사소하게 넘어갈 수 있는 실수나 비상식적 행위가 훗날 큰 사고로 돌아올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해외에서도 일부에서 미숙한 시민의식을 드러내는 일이 비일비재한 만큼 한국만 특정해서 비판할 사안은 아니다. 다만 2000년대 들어 벌어진 세월호와 이태원 등 사회적 참사를 곱씹지 않는다면 사회 안전망과 시민의식은 제자리걸음을 걸을 수밖에 없다.

앨리스테어 로스 런던 메트로폴리탄 교수는 '적극적 시민권을 위한 다중 정체성과 교육'(Multiple identities and education for active citizenship)이라는 논문에서 시민의식을 "시민을 위해서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공동체 개선을 지향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나의 편익만 고집하지 않고 '시민'을 위한 노력과 참여를 강조한다. 위험하고 낯선 상황에서도 이웃을 위해 기꺼이 손을 내민 시민들처럼. 매뉴얼을 만들고 제도를 개선하더라도 타인을 향한 배려와 공감 준법정신 등 성숙한 시민의식이 결여되면 무용지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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