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후반 중동부 유럽으로 회원국을 대폭 확대해 온 EU는 중국과의 외교관계에서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나타내었다. 이 시기 EU는 중국에 대한 일관되고 단일한 외교관계를 설정하지 못한 채, 개별 회원국에 의한 각각의 대중국 관계 전략이 난무하였다. 당시 개별 회원국과 중국의 관계는 정치적 단호함-경제적 자유무역, 정치적 단호함-강경한 통상정책, 정치적 유화주의-경제적 보호주의, EU-중국 관계에 의존한 대중국 전략을 펼치는 국가군으로 구분되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유럽이 재정위기를 겪는 과정에서 중국과의 관계는 급변하게 된다. 위기의 유럽은 중국의 자본이 필요했으며, 중국은 유럽과의 경제협력 강화를 통해 미국을 견제하고 주요 2개국(G2)으로 성장할 단초를 잡을 수 있었다. 미국 트럼프 정부가 출범한 2017년부터 본격화한 미·중 갈등으로 다른 주요국들은 외교관계에서 깊은 시름에 빠지게 된다. 이익의 균형을 저해하지 않으면서도 실리를 추구하는 전략적 외교 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하게 된 것이다. 2019년 연말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확산 상황에서 EU는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장기 목표를 제시하고, 최근 경시되어 온 다자체제와 국제협정을 재건할 필요성을 되새기게 되었다. 이는 미·중 갈등이 격화됨에 따라 주변국이 처해 온 외교적 딜레마 상황에 대해 유럽의 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이후 EU는 중국과의 양자관계에 대해 ‘공정하고 호혜적인 동반자 관계(Fair and Reciprocal Partnership)’가 될 수 있도록 이슈별 협력을 조율해 왔다.
독일 또한 외교 딜레마 상황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독일은 민주주의 가치동맹에 찬성하고 미국의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즉 동맹 및 우방국 간 공급망 안보 구축 전략에 동참하면서도 중국과의 경제협력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시진핑 주석이 지난달 중국 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를 통해 3연임을 확정한 이후 정상회담을 통해 외교관계 강화를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독일의 숄츠 총리가 이달 4일 중국을 전격 방문하기로 하였다. 중국 측 입장에서 독일과의 정상회담은 많은 기회로 해석될 수 있다. 중국 정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과의 악화된 관계를 개선하고, 미국의 가치동맹 전략을 견제하는 계기로 독일과의 협력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숄츠 총리는 폭스바겐(Volkswagen), 지멘스(Siemens), 도이체방크(Deutsche Bank), 머크(Merck) 등의 기업과 산업단체 대표를 포함한 대규모 방중단을 꾸렸다. 숄츠 총리는 그동안 무엇이 국가이익인가를 지적해 왔다. 앞서 지난달 27일 독일 정부는 자국 최대 항만인 함부르크항 톨러오르트(Tollerort) 터미널 지분 일부를 중국 국영 해운사 중국원양해운(코스코·COSCO)에 매각하는 데 대해 승인하였다. 미국의 대중국 강경정책 기조하에서 서방의 기간시설에 중국기업이 투자, 진출하도록 한 독일의 결정은 많은 논란이 되었다. 게다가 최근 독일 정부가 도르트문트에 본사를 둔 반도체 제조기업 엘모스(Elmos Semiconductor SE)를 스웨덴 질렉스(Silex)에 매각할 것인지에 관해 검토하고 있음이 밝혀지며 논란이 되었다. 질렉스는 중국 IT기업 사이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ai Microelectronics)의 자회사이기 때문에, 중국이 독일의 핵심산업 기술회사를 인수하는 셈인 것이다. 이에 대해 독일연방헌법보호사무소는 독일 반도체 시장의 중국 의존 심화를 이유로 거래 승인에 반대하였다.
최근 숄츠 총리의 대중 전략은 다양한 견해에 직면하였다. 우려의 목소리는 균형외교의 필요성을 존중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 강화가 경제 논리에만 그치지 않고 중국의 법치주의 및 민주주의 향상이라는 장기적 변화의 방향과 연계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적어도 시진핑 주석이 3연임을 확정 지은 상황에서 경제협력을 통한 권위주의 정부 변화라는 논리는 실패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숄츠 총리는 국내의 다양한 목소리를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 새로운 시기의 중견국 전략을 선택했다. 독일이 범대서양 동맹과 민주주의 가치동맹을 수호하면서도, 중국에 대한 밀착협력을 통해 독일의 실리를 추구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