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가속화된 공급망 붕괴와 미·중 간 갈등 심화 등으로 이들보다 먼저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해온 기업들의 탈중국 현상은 지난달 통과된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한층 속도가 빨라질 전망이다.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이란 이름으로 구체화된 조 바이든 대통령의 경제복구정책(Build Back Better Plan)은 뉴딜 정책 이후 가장 큰 규모로 평가받는 공공투자 프로젝트. 10년간 7370억 달러(약 995조 원)가 투자되는 야심 찬 플랜이다. 에너지와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 태양광, 전기차 등 신재생에너지 산업, 의료 보건산업 등에 주로 투자된다.
이 법의 핵심은 관련 제품 조달과 세제 혜택은 미국 내에서 생산된 제품에만 제공한다는 것. 미국 정부의 타깃은 중국이다. 이미 값싼 중국산 부품을 사용하지 않고 생산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인 공급망 시스템 속에서 탈피해 ‘메이드 인 아메리카’로 전환한다는 게 무리가 있지만, 미국으로선 ‘중국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고’ 이참에 제조업을 되살려 미국의 부흥을 이룩하겠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 다음으로 큰 타격을 입는 게 한국이다. 배터리와 재생에너지 산업 등 미국 내 생산기지를 구축한 일부 분야는 미국의 재건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투자를 더 확대할 기회를 잡을 수 있지만 미국 내 생산공장을 확보하지 못한 전기자동차 등은 결정타를 맞은 셈이다. 예컨대 부품의 상당 부분을 중국산 등에 의존하고 있는 업계로선 미 정부가 지급하는 대당 7500달러(약 1000만 원)가량의 보조금을 못 받게 되기 때문이다. 테슬라(74%)에 이어 전기차 시장 2위(9%)를 점유하고 있는 현대 기아차의 가격 경쟁력은 치명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업계는 적어도 10만 대가량의 수출 차질이 불가피할 걸로 보고 있다.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어렵게 쌓아 올린 전기차 시장 2위의 금자탑이 무너질 위기다. 문제는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넋을 놓고 있었던 관련 업계와 정부다. 이 법안은 지난해 9월 27일 존 야무스 연방하원의원(켄터키)이 상정, 지난달 16일 바이든 대통령이 최종 사인까지 거의 1년 가까이 끌면서 논란을 거듭했던 법안이다. 미리 대처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이 법안이 하원에서 통과된 건 지난해 11월. 이때만 해도 상원 통과가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 요구를 반영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기회가 있었는데 다 놓쳤다.
5월 바이든 대통령이 방한 했을 때 “한국은 9만4000명의 중산층을 먹여 살리는 가장 큰 무역, 투자 파트너”라는 의례적 멘트에 감격해 삼성전자의 대미 투자 선물만 들이밀 게 아니라, 인플레이션 감축법안이 우리 기업들에 미치는 파장을 설명하고 피해 갈 수 있는 대안을 요구했어야 했다. 이게 두 번째 실기다.
기회는 또 있었다. 8월 초 한국에 온 낸시 펠로시 연방하원의장을 붙잡고 조언을 구했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의 만남이 불발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놓고 소모전을 벌일 게 아니라, 동행한 앤디 김 하원의원(뉴저지)을 통해 하소연이라도 했어야 했다. 적어도 상원 통과(7일) 직전에 의견을 개진할 기회조차 날린 것이다.
우리 기업과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동안 일본 기업들은 로비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 지난해 도요타는 대미 정부 로비로 620만 달러를 썼다. 970만 달러를 쓴 GM에 이어 두 번째. 혼다, 닛산도 각각 250만 달러를 썼다. 덕분에 일본 자동차 업체들은 피해를 모면할 수 있게 됐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뒤인 지난달 말 우리 정부 대표단은 헐레벌떡 미 관계자들을 만나 공동협의체 구성을 요구했다. 업계는 세계무역기구 규범과 상충한다는 점을 부각해야 한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국회도 1일 슬그머니 세제지원 촉구 결의안을 내밀었다. 모두 실현 가능성이 없는 사후 약방문이다. 선거를 앞두고 미 대통령이 사인까지 한 마당에 이를 뒤집을 수 있는 방안이 과연 있을까. 한국 정부와 기업, 어디에도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