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 달보다 4배나 더 멀리 떠난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이 멋진 은하단 사진을 보내왔다. 밤하늘의 별보다 더 영롱하고 휘황찬란한 빛의 단위 하나하나가 수백억 개의 별들이 모인 은하들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이 우주망원경 개발에는 25년간 13조 원이라는 인류 자원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저 우리에게 아름다운 우주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만은 아닐 듯하다. 이 우주망원경을 띄우며 공감한 이야기는 ‘우주가 탄생하던 순간을 향해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한다’는 말이었다. 본질적으로 호기심의 발로이고,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이만한 자원을 투입할 만큼 인류가 성장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우주망원경의 주된 임무는 적외선을 조사해 관측 가능한 우주의 초기 상태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사진으로 보이는 우주의 빛은 100억 광년 떨어진 전체라니 100억 년 전의 물질과 에너지의 변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외계 생명체에 대한 궁금함도 내가 어떻게 여기 있는지, 어떻게 어우러져 생명활동을 이어가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인지를 비교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인류 인식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물질과 에너지 변화, 생명에 대한 이해가 마음과 행동을 움직여 인류 생명으로서의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지속 가능성을 열어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주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나의 생명 활동은 만년의 인간 역사와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고, 나를 살리는 원천은 태양과 먹어서 얻는 에너지에 한정된다. 우리 세대가 살고 있는 시기는 사회를 이루어 자원이란 이름으로 물질과 에너지를 나누고, 우주의 이치를 어렴풋이나마 들여다보고 이해하는 수준에 와 있다. 인류의 번영과 성취가 이만하면 대단하지 않은가?
물론 누적된 문제와 시급한 과제들도 있다. 발전 과정의 불가피한 경쟁과 쟁투로 인한 것인데, 정치와 경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자원을 둘러싼 문제이다. 물질과 에너지의 변형과 배분의 쏠림과 순환 왜곡이 기후위기와 양극화를 초래해 왔다. 역사와 우주의 이치를 이해하려는 수준에 도달한 인류의 성취에 비추면 잉여자원을 늘리고 차지하려는, 이치에서 어긋난 상황이다. 잉여자원이 줄면 위임 권한은 회수될 것이다. 잉여 없이 물질과 에너지의 양극화가 지속될 수는 없기 때문에 정점에 이르러 드러나면 균형과 안정을 향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우주의 별도 수명이 있듯이 인류 절멸에 이를 수도 있지만, 생명의 지속성 이치로 보면 아직 자멸할 때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아직 필요 자원은 나누어 살 만하고, 선택의 시간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조선 말기 오랜 가뭄과 기근이 있었다. 특히 1888년 무자년 대흉년은 개국 후 처음이라 기록될 만큼 심했다. 기근에 힘겨운 삼남지방에 사람과 만물이 우주 생명을 모시고 있음을 설파하던 해월 최시형은 ‘밥 한 그릇의 이치를 알면 온 우주의 이치를 안다(食一碗 萬事知)’는 법설을 내린다. 나의 생명을 살리는 한 그릇의 밥이 농부와 밥 짓는 이들의 손길만이 아니라, 해달별과 물 바람, 개구리 지렁이 미생물 등 우주의 모든 것들이 협동하고 작용하여 내게 오는 것’이라는 뜻으로, 귀해 나누라는 말씀이다. 해월을 좋아하고 말씀을 전해주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도 말년에 ‘좁쌀 한 알 속에 우주가 담겨 있다’는 호를 쓰기도 했다. 사람 생명과 밥과 우주의 물질과 에너지 순환의 이치를 통찰하는 이야기들이다.
현실로 눈을 돌리면 우주의 이치는 고사하고, 가까운 역사나 이웃 나라로부터도 아무런 배움을 얻지 못하는 정부와 여당, 야당 일부의 ‘부족’ 수준의 정치, 부유하다는 족속들이 엘리트니 기득권이니 챙기고 헐뜯는 꼴을 보자니 참으로 유치하고 한심하다. 백여 년이 지나 우주망원경이 사진으로 보여주는 밥 한 그릇의 이치는 꼴사나운 세상도 결국 우주 생명의 흐름으로 돌아갈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