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에 그는 전경련에 발길을 끊었지만 최종현 회장이나 김우중 회장 때는 자주 참석하는 편이었다. 그는 항상 회의가 열리기 10분 전에 도착했다. 가장 빨리 오는 참석자였다. 비서실에서 안내를 하던 필자가 “오늘도 제일 먼저 오셨습니다” 하면 밝은 웃음을 지으며 “제 집이 여의도에 있잖아요” 했다. LG의 쌍둥이 빌딩이 전경련 회관 5분 거리의 지척에 있으니 빨리 오는 것이 예의라는 듯했다. 순화되지 않은 진한 경상도 억양까지 배어 있으니 그 말은 훨씬 정겨워 보였다.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일화가 또 있다. 한여름 대낮에 곤지암의 화담수목원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나무를 가꾸고 있는데 지나가던 탐방객이 길을 물어 가르쳐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탐방객이 돌아서면서 “재벌들이 너무 하네, 어째 이런 땡볕에 저런 나이 먹은 사람을 부려 먹냐”고 하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회장인 줄 알았으면 “재벌도 불쌍하네, 뭣 하러 이 땡볕에 나와 일하냐” 하며 오히려 측은해했을 거라고도 했다. 가진 사람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태가 보였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일화였다. 그만큼 그는 소탈하고 평범했다.
그의 전경련 회장단 합류는 1989년 부친인 구자경 회장이 전경련 명예회장으로 추대되면서 이뤄졌다. 관례에 따라 그는 전경련 출입기자단과 상견례를 겸한 간담회를 했다. 후계자의 첫 언론 데뷔전이라 LG그룹 홍보실은 무척 신경을 썼다. 사실 그때까지도 구자경 회장의 직설적인 발언 때문에 빚어진 노동계, 정계와의 갈등으로 LG그룹은 초비상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튀지 않게 겸손한 자세로 간담회를 마쳐 큰 호평을 얻었다. 그 이후 언론계에 팬덤 같은 지인들이 생겼고 그 인연을 LG 상남언론재단의 인재 양성과 글로벌 연수로 이어갔다.
싱글 핸디인 그의 골프 실력은 재계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특히 라운딩 내내 배꼽을 잡는 유머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전경련 회장단 초청 골프 시합에서 “정세영 회장은 정타, 장치혁 회장은 장타인데 나는 구씨라 항상 굿샷입니다” 하고 좌중을 웃음에 빠뜨리며 티샷을 날린 일화도 있다. 물론 그 공은 똑바로 멀리 날아갔다. 정타에 장타를 더한 명실상부한 굿샷이었다. 한 참석자는 “Y담은 뽀빠이보다 낫다”고도 했다. 그의 호가 화담(和談)이었음을 빗댄 것이었지만 그만큼 친근하고 부드러웠다.
구 회장은 소탈했으나 원칙에는 단호했다. 노무현 대통령 때 청와대 초청으로 열린 전경련 회장단 행사에서 이건희 회장이 구 회장에게 이제는 전경련 회의에 좀 나오시라고 이례적인 요청을 했다. 대통령이 있는 자리라 긍정적 답변을 기대했겠지만 구 회장은 묵묵부답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본인은 참석하지 않았다. 국정농단 청문회에서 한 국회의원의 “대통령이 돈을 달라면 언제든지 주냐”는 고압적 질문에 “국회에서 법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가해자인 정치가 피해자인 기업을 윽박지르는 데 대한 통쾌한 반격이었다. 전경련은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같이 국가의 미래를 연구하는 데 주력해야지 이익단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펼쳤다. 아마도 전경련이 구 회장의 주장대로 환골탈태의 모습을 보였다면 그의 복귀도 이뤄졌을 것이고 재계도 실추된 명예를 되찾았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이런 곧은 성격 때문에 LG는 GS와의 계열 분리 때 어떤 뒷말도 뒤탈도 없었다. 그때 구 회장이 제시한 원칙은 딱 하나, “돈 되는 것을 먼저 줘라”였다. 건설, 정유, 유통, 호텔이 그래서 GS의 품으로 넘어갔다. 재벌가에 그 흔한 고소, 고발, 분규 한번 없이 지주회사 전환이라는 선진적 지배구조를 확립할 수 있었던 것도 원칙에 대한 그의 집념 덕분이었다. 돈 되는 것을 넘겨주고도 그는 1994년 취임 당시 30조 원 수준이었던 LG의 매출을 2017년에 160조 원으로 5배 이상 늘렸다. 원칙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구 회장은 그의 회장 재임 중 실적으로 입증했다. 한 해의 봄을 또 보내며 부드러웠으나 원칙에는 단호했던 외유내강의 경제인, 구본무 회장의 참모습을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