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가입자가 퇴직연금 적립금을 운용할 금융상품을 결정하지 않으면 사전에 정해둔 방법으로 적립금이 운용되도록 하는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이 12일부터 본격 시행된다.
디폴트옵션은 본인이 선택하지 않으면 당초 정해진 대로 자동으로 선택이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개인 컴퓨터를 디폴트값(기본값)에 따라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퇴직연금에도 이런 디폴트옵션을 도입한 것이다. 디폴트옵션은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과 개인형퇴직연금(IRP) 가입자에게 적용된다. 회사가 퇴직연금 적립금을 특정 상품에 투자한 뒤 만기가 됐을 경우 은행·증권사 등 사업자와 미리 협의해둔 상품에 적립금이 자동 투자된다.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 적립금은 295조6000억 원에 달한다. 국내 디폴트옵션 도입으로 퇴직연금 수익률에도 큰 변화가 나타날 것으로 기대된다. 리처드탈러 시카고대 경제학과 교수는 1990년대 중반 UCLA의 슐로 모베르나치 교수와 함께 퇴직연금 가입자들의 디폴트 옵션을 설계하는 실험을 했다. 몇 가지 옵션 변경만으로도 근로자 절반의 평균 저축액이 2년 만에 소득의 3.5%에서 11.5%로 크게 늘었다. 실제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이미 오래전부터 퇴직연금제도에 디폴트옵션을 도입한 미국, 영국, 호주 등의 주요 선진국에서는 연평균 6~8%의 안정적인 수익률 성과를 내고 있다. 국내 DC형 퇴직연금의 10년 연평균 수익률은 2.7%에 그친 반면, 미국과 호주는 각각 8.6%, 7.7%에 달했다.
디폴트옵션에는 총 6주 정도가 소요된다. 최초 계약이나 기존에 운용지시한 상품의 만기도래가 도래했음에도 운용지시가 없는 경우 4주가 지나면 디폴트옵션으로 운용됨을 통지받고, 통지 이후 운용지시 없이 2주가 경과하면 적용된다. 디폴트옵션으로 운용 중에도 가입자의 의사에 따라 언제든지 원하는 다른 방법으로 운용 지시할 수 있다. 가입자가 직접 퇴직연금을 운용하다가 디폴트옵션으로 전환하려는 의사가 있을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다.
현재 승인 가능한 상품 유형으로는△원리금보장상품 100% △타깃데이트펀드(TDF) △밸런스펀드(BF) △스테이블밸류펀드(SVF) △사회간접자본펀드(SOC) 등 펀드상품 100% △원리금보장상품과 펀드상품을 혼합한 포트폴리오 상품 등이다. 이들 상품은 고용노동부 소속 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제도 시행일인 12일 이후 퇴직연금사업자로부터 신청을 받아 10월 중 첫 번째 심의위원회를 거쳐 승인된 상품이 공시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디폴트옵션을 나에게 맞는 투자상품을 정리해볼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먼저 기존에 근로자가 가지고 있는 상품을 점검해야 한다. 현재 어떤 상품에 투자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퇴직연금 사업자가 제시하는 상품의 특징을 파악해야 한다.
사전지정운용상품을 정하는 기준도 세워야 한다. 원리금보장상품에 가입중이라면 현재 상품이 제공하는 금리 수준에 만족하는지, 만기가 언제인지, 금리는 얼마인지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원리금보장상품의 수익률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TDF, 자산배분형 펀드, 머니마켓펀드(MMF), 부동산인프라 펀드 등 투자상품으로 디폴트옵션을 설정하면 된다.
다만, 펀드를 구성하는 자산군의 종류와 비중을 잘 살펴야 한다. 퇴직연금은 장기적으로 운영되지만, 시장상황은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 때에는 주식 비중을 높이고, 은퇴에 맞춰 주식비중을 낮추는 식의 자동조정을 원한다면 TDF와 같은 상품을 선택하면 된다. 반면, 주식 비중을 일정하게 유지하며 시장상황 대응을 원한다면 자산배분형 펀드를 고려하면 된다. 자산군 비중과 함께 과거 수익률, 변동성의 범위도 체크해야 한다.
김동엽 미래에셋투자와연금센터 상무는 “DC형 퇴직연금 가입자가 해야 할 일은 현재 내가 투자하고 있는 상품을 점검하고, 앞으로 어떤 상품에 투자할지 전략을 세우는 것”이라며 “변화의 바람이 불 때 바람을 피해 담장 밑에 숨기보다는 바람을 이용해 풍차를 돌리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금융당국은 퇴직연금이 장기 수익률을 높이며 향후 노후자산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만, 투자 무관심층이 여러 선택지를 놓고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현금성 자산에 머무를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연금 선진국들은 퇴직연금사업자가 디폴트옵션 상품 여러 개를 기업에 제시하면, 해당 기업은 그중 하나를 골라 근로자 대표의 동의를 얻어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지정하게 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퇴직연금사업자가 제시한 여러 개의 디폴트옵션 상품을 기업이 모두 선택하고, 결국 근로자가 여러 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진국은 디폴트옵션 상품 수익률이 마이너스가 돼도 기업의 책임을 면해주지만, 우리나라는 기업의 면책 조항이 없이 때문이다. 근로자가 디폴트옵션 상품 홍수 속에 아무 선택도 하지 않고 방치하는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석훈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디폴트 방식을 통해 투자 선택에 어려움을 가진 이들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디폴트옵션 본연의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라며 “가입자를 위한 효과적인 정보제공이나 투자자 교육이 마련되어야 하며, 퇴직연금사업자들은 디폴트옵션을 잘 구성하고 상품 설명을 알기 쉽게 잘 고안해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