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어머니는 돌아가시지 않았다. 나는 한밤중 요양병원의 텅 빈 복도의 긴 의자에 앉아 들고 간 책을 읽었다. 영생의 믿음을 가진 신실한 신자인 어머니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겁을 먹은 소녀 같았다. 소심한 어머니는 한 번도 겪지 못한 낯선 세계로 넘어간다는 사실에서 오는 두려움에 떨었다. 이튿날 어머니는 평온한 죽음을 맞았다. 여동생들이 어머니를 쓰다듬으며 오열을 터뜨렸다. 잘 가시라고 나는 여동생들 뒤에서 가만히 속삭였다.
어머니가 평생 꽃을 살 줄 모르고, 명품 구두나 백을 산 적도 없다. 어머니가 곤핍함 속에서 살다가 떠났다는 게 슬펐다. 죽음은 사유에 균열을 일으키며, 이 균열에서 물음들이 쏟아진다. 나 역시 그랬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떠오른 생각은, ‘이제 어머니의 시간은 멈추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삶이 존재를 전유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시간의 지속에서만 가능하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타인의 죽음에서 빌려온 것이다. 자기의 죽음이란 경험으로 환원할 수 없는 불가능성 그 자체인 탓이다.
감각하고 사유하고 활동하던 시간, 삶이라는 수고를 치르는 시간은 죽음과 함께 돌연 그친다. 살아 있는 자에게 죽음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저 너머의 일이다. 죽은 자의 시간과 산 자의 시간은 어떻게 다른가? 어머니의 시간은 기다림이나 불안이 없고, 일체의 의미작용이 정지된 시간이다. 나의 시간은 여전히 바글거리는 기다림과 불안으로 충만하고, 현존재의 존재함에서 발생하는 의미작용의 시간이다.
세상에 없는 몸으로 돌아간 어머니가 이 세상에 없다는 분별은 또렷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떨어져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탓에 어머니와의 추억은 많지 않다, 메마른 내 가슴의 한가운데로 툭 던져진 어머니의 죽음은 덧없고 쓸쓸했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 식탁 의자에 혼자 앉아 있을 때 비로소 낯선 슬픔이 몰려왔다. 늙은 어머니와 지내던 집은 텅 비었고, 나는 탁자에 이마를 댄 채로 울었다. 내 슬픔은 어머니가 말할 수 없고 몸 없는 비존재의 시간으로 돌아갔다는 또렷한 실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우리는 몸을 기반으로 산다. 온갖 냄새와 소리로 가득 찬 이 세계를 보고 듣고 냄새를 맡는 것은 오감을 느낄 수 있는 몸을 가진 덕분이다. 우유와 버터를 먹고, 포도주를 들이켜고 취하며, 육즙이 풍부한 스테이크를 씹으며 만족감에 빠지는 것도, 살을 비비며 사랑을 나누는 것도 다 몸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몸이 없다면 삶도 없다. 그러니 몸이 정신, 혹은 이성의 부속물이라는 것은 헛소리다. 몸이 곧 자아이고, 삶을 실행하는 실체다. 몸이 아프면 자아가 아픈 것이다. 산 자에게 몸은 자아가 세계와 만나는 최전선이지만, 죽은 자의 몸은 없는 몸이다. 어머니는 이 세상에 없는 몸, 나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없는 몸이다.
우리 몸은 피를 가득 담은 부대자루다. 신체에 담긴 피의 양은 얼마나 될까? 체중 70킬로그램인 사람의 경우, 약 5.6리터 정도의 혈액을 갖고 있다, 심장은 이 붉은 액체를 퍼 올리는 펌프다. 심장에서 나온 피는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흐른다. 인체 말단까지 펼쳐진 혈관의 총길이는 9만6000킬로미터에 이른다. 이는 지구 두 바퀴 반을 도는 길이다. 피는 그 긴 혈관을 돌며 말단 세포에 필요한 산소와 영양분을 전달하고 노폐물을 나른다. 모세혈관은 산소와 이산화탄소, 영양분과 노폐물을 교환하는 자리다. 피가 없다면 신체는 산소와 영양 공급을 받지 못한 채 죽는다. 또한 피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같은 혈액 세포로 이루어지는데, 이 중 백혈구는 인체에 침투한 세균을 먹어치운다.
몸은 외부 물질을 먹고 삼켜서 신진대사를 한다. 외부 물질을 제 안에 들여 에너지로 교환하는 과정이 신진대사다. 몸이 풀무질을 하는 동안 우리는 몸을 쓰며 무언가를 한다. 몸은 유한한 시간을 가진 소비재다. 우리는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가운데 죽음에 다가간다. 대개는 낭자한 선혈을 뿌리며 죽지 않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 인간은 화장장에서 한 줌 연기로 사라지면서 존재의 끝에 도달한다. 죽음이 몸을 삼키고 삶을 무화시킨다. 존재의 소멸이고, 몸에서의 해방이며, 현상적 세계에서 없음[無]으로, 즉 몸을 해체하고 낱낱의 원소로 돌아가는 일이 죽음이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을 겪으며 얼떨떨한 채로 어디선가 도래하는 낯선 시간과 마주했다. 죽음은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시간의 종말에 다다르는 것,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죽음을 “나타남의 전복”(‘신, 죽음 그리고 시간’, 77쪽)이라고 한다. 불쑥 나타나는 죽음은 존재 양태 안에 숨은 본래성이지만 정작 자기 죽음의 진상을 사유하는 건 불가능하다. “죽음은 자기를 통한 자기 파악의 한 계기로 세계 속에서 사유된다.”(앞의 책, 136쪽) 죽음은 존재 이해의 범주 안에서만 사유가 가능하다. 우리 앞에 열린 길은 죽음의 가능성에서 도망가는 일이다. 죽음에서 탈주하는 기획의 총체를 우리는 삶이라고 부른다.
몸으로 살다가 죽는 점에서 동물과 인간은 다를 바가 없다. 인간의 죽음과 자연에서 동물이 겪는 죽음은 어떻게 다른가? 인간만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가능한 한 그것을 늦춘다. 인간은 온갖 연명치료를 하며, 죽음에 저항하다가 천천히 죽어간다. 반면 동물은 망설임이나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는다. 동물은 병 들거나 늙으면 혼자 죽을 자리를 찾아가 몸을 뉘고 죽는다. 나는 새나 늑대가 시름시름 앓으며 연명치료를 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죽음을 존재 양태가 품은 최악의 조건, 무한한 불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인간은 이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죽음은 삶의 의미와 생기라는 즙을 다 빨아들이고 마른 껍데기만 남긴다. 죽음은 삶의 수수께끼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이 수수께끼를 화두로 던진다. 어떤 인간은 이 수수께끼를 피해 달아나고, 다른 인간은 이 수수께끼를 끌어안고 고뇌에 빠진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이 라틴어는 “네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죽음이 종말이고, 생의 약동을 그치는 것임을 안다. 그런데 왜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을까? 인간은 죽음이란 문지방을 넘어 존재 이전으로 건너간다. 아인슈타인 같은 석학도, 붓다 같은 성자도, 이걸 피할 수는 없다. 죽음을 사유하는 것은 산 자의 의무다. 우리의 본분은 시간을 꿋꿋이 견디며 사는 데 있다. 우리는 죽음에서 사유된 시간을 자기 시간으로 갖는다. 도래하지 않은 죽음을 기억하는 자만이 제 삶의 시간을 의미로 채울 수 있다. 잘-죽음은 잘-삶에 잇대어 있다. ‘메멘토 모리’라고, 나는 혼잣말로 되뇐다. 이 말은 ‘나의 무화와 맞서고 살아 있음 속에서 충만하라!’는 뜻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