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량을 불에 태워라.”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다. 신 회장은 거기에 더해 그날 출고품뿐만 아니라 최근 며칠 사이에 만든 제품과 원료 모두를 불태우도록 지시했다. 직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러나 충격의 크기만큼 위생관리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계기가 된다면 감수할 만한 손실이라고 신 회장은 생각했다. 자신이 먹기에도 꺼림칙한 제품을 고객들에게 내놓을 수는 없었다. 부대 속의 초콜릿 원료는 불타 없어졌지만 고객을 향한 다짐은 새롭게 잉태됐다. 순간의 이익에 매몰되지 않은 그의 선택은 오늘날 한·일 두 나라를 아울러 자산 110조 원이 넘는 롯데그룹을 키우는 바탕이 됐다.
1977년 8월 1일, 발전송풍 설비공사 현장을 돌아보던 박태준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 사장의 눈에 기초 콘크리트 구조물의 하자가 눈에 띄었다. 이미 공사가 80%가량 진행되어 높이 70m의 굴뚝도 올라가 있었다. 현장 책임자에게 대책을 물어보니 울룩불룩 나와 있는 문제의 부분을 뜯어내고 다시 시공하겠다는 대답이 왔다. 동시에 쇳덩이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당장 폭파해.” 다음 날 포항제철 안에 있는 모든 건설현장의 책임자와 외국인 감독, 그리고 임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꽝. 꽝. 꽝.” 송풍 발전소 공사현장이 폭파됐다. 모여든 사람들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보이는 것은 없어졌지만 보이지 않는 각오가 그들의 가슴에 오롯이 새겨졌다. “포철의 사전에 부실공사는 없다.” 현장 풍토를 일대 쇄신한 박태준은 그해 가을 한국 최초로 정부 보증 없는 차관 도입에 성공했다. 포철 예산 반대라는 국회의 결의가 무력화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5년 3월 불량이 발생한 휴대폰, 팩스, 전화기 등 15만 대, 150억 원어치를 수거해 구미사업장 안에 쌓았다. 당시 삼성의 휴대전화 국내시장 점유율은 30%까지 올랐다. 그러나 무리한 제품 출시로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았다. 고쳐 주거나 환불해 주기 위해서 물건을 파는 격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시중에 나간 제품을 모조리 회수해 공장 사람들 보는 앞에서 태워 없애라고 했다. ‘불량은 암이다’, ‘돈 받고 파는 물건인데 미안하지도 않느냐’며 현장을 질타했다. 삼성전자 직원들은 품질 확보라는 머리띠를 두른 채 바닥에 나열된 불량 삼성 제품을 망치로 때려 부쉈다. 그리고 쌓인 재고에 기름을 부어 전부 태워버렸다. 당시 무선 부문 이사였던 이기태 부회장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생산을 담당한 2000여 명의 직원들은 너나없이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그러나 그들의 눈물은 최고의 품질로 승화됐다. 품질 최우선의 경영이 사내·외에 각인됐고 삼성 휴대폰의 품질은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그해 애니콜은 모토롤라를 누르고 국내시장 1위에 올라섰다. ‘애니콜 신화’의 시작이었다. ‘1인당 1대의 무선전화기를 갖는 시대가 반드시 온다’ 그리고 ‘최고 품질의 전화기를 봐야 한다’는 최고경영자의 미래를 향한 혜안과 최고에 대한 집념이 오늘날 세계 1위, 매출 300조 원을 바라보는 삼성전자의 문을 열었다.
이들이 불태우고 폭파하고 부순 것은 사내의 만연한 무사안일과 기득권이었다. 죽기 살기로 했기에 회사 밖의 청탁과 부조리에 대하여도 단호했다. 설계가 다 끝난 35층의 롯데호텔을 18층으로 낮추라는 통보가 신격호 회장에게 왔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청와대 경호실의 사실상 지시였다. 그러나 신격호 회장은 정면으로 대응해 뒤집었다. 차관 리베이트와 이권 청탁에 맞서 박태준 회장은 대통령으로부터 ‘종이 마패’를 받아 외압을 극복했다. ‘기업 2류, 정치 4류’라며 정치권을 질타한 이건희 회장의 발언은 정치 9단을 자처한 대통령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위축되지 않고 기업을 더 키워 보복에 맞섰다. ‘타는 목마름’처럼 폭파하고 불태우고 부숴가면서 그들은 세계 최고의 품질과 초우량의 기업문화를 얻었다. 그 사이 나라는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사물은 부서질 대로 부서져야만 비로소 순수한 근원의 힘을 내뿜는다”는 시인의 외침은 우리 경제인들의 치열했던 몸부림과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