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한마디에 순간 머리가 마비된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내가 너무 바보처럼 살았나….
며칠 후 출근하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은 순식간에 스산한 진회색으로 변하고, 가로수는 이리저리 휘청이며 비틀거리는 모습이다.
정신없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제일 좋아하는 ‘예가체프’ 드립 커피를 한 잔 내린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후, 내원한 환자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무심코 창밖을 보니, 밖은 여전히 거친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아! 참, 편안하고 행복하다’라는 느낌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상념이 이어지며,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이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을 때의 일화가 떠올랐다. 그는 강제노동하면서, 간수가 안 보는 틈을 타 주머니에서 돌처럼 딱딱해진 빵조각을 몰래 입에 넣어서 녹여 먹곤 했는데, 그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해방되고 난 후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행복감도 수용소 시절의 빵조각보다는 못했으리라.
내 생활은 단조롭기 그지없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출근하면, 9시에서 7시까지 진료를 한다. 점심시간에 운동을 잠깐 하고, 퇴근 후 간혹 근처의 친구들을 만나 저녁을 먹거나 하는 것 외엔 곧바로 집에 들어간다. 12시까지 막내딸과 함께 큰 거실 책상에 같이 앉아 공부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조용한 거실에서 잠깐씩 담소를 나누며, 각자 자신의 공부를 할 때는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부럽지가 않다. 물론 알코올, 여흥 등의 더 강한 자극은 바깥세상에 넘치고, 또 젊은 시절 그 세계를 잠시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잔잔하고 작은 자극에서 오는 행복도 강렬하고 큰 자극에서 오는 행복과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
“행복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며, 주관적이다.” -무명씨의 말
최영훈 닥터최의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