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19. 런던이 ‘런던그라드’라 불리는 까닭

입력 2022-04-1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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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 올리가르히 제재 美·EU 절반, 우크라 난민 엄격 심사…유럽 박차고 나온 ‘글로벌 영국’의 현실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팟캐스팅 안쌤의유로톡 운영자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팟캐스팅 안쌤의유로톡 운영자
‘65명 vs 26명’

미국과 유럽연합(EU)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러시아의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의 자산을 동결하고 입국을 금지했다. 65명은 지난달 15일 기준으로 미국과 EU가 제재를 부과한 올리가르히의 숫자다. 영국의 26명과 격차가 크다.

영국은 EU가 주권을 제한하고 규제가 많다며 EU로부터 탈퇴했다(브렉시트). 그런데 탈퇴한 영국이 왜 이렇게 제재를 부과하는 데 늦을까? 브렉시트를 했기 때문에 훨씬 더 신속하게 제재를 가해야 하지 않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런던이 왜 러시아 도시가 됐는지를 알아보자. 아울러 ‘글로벌 영국’이라는 수사와 다르게 영국이 우크라이나 피란민 수용에 왜 그리 소극적일까?

‘템스 강의 모스크바’ 런던

그라드(Grad)는 러시아어로 도시를 뜻한다. 런던은 왕왕 ‘템스 강의 모스크바’, 혹은 러시아의 런던을 뜻하는 ‘런던그라드’(Londongrad)로 불려왔다. 그리고 그 추한 모습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더시티’(The City)는 흔히 런던 안의 런던으로 불린다. 런던 지하철역 리버풀 거리에서 내리면 마천루가 즐비하다. 1평방마일에 걸쳐 있는 더시티에는 금융서비스 산업이 밀집돼 있다. 이 산업은 영국 세수의 10% 정도를 차지하며 흑자를 내는 영국의 대표적인 효자 산업이다. 19세기 대영제국 시대부터 제국의 중심지로서 각종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이 식민지를 대부분 상실한 후에도 이런 기능은 지속돼 왔다.

영국의 국가범죄국에 따르면 해마다 1000억 파운드, 약 150조 원 정도가 이곳에서 세탁된다고 추정된다. 고객의 비밀을 철저하게 유지해주고, 문제가 생기면 이런 조항을 근거로 컨설팅회사와 홍보회사가 달려들어 소송을 걸어 고객의 자산을 철통같이 지켜준다. 이러니 러시아의 올리가르히뿐만 아니라 각국의 독재자들이 런던의 더시티를 찾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세회피지서 돈세탁 후 런던으로

이뿐만이 아니다. 영국령에 속하는 카리브해의 브리티시 버진 아일랜드와 케이먼섬 등은 유명한 조세회피지이다. 이곳에 유령회사를 세워 자금을 빼돌리고 이 돈으로 런던의 값비싼 부동산을 구입한다. 국제투명성기구(TI)는 런던의 첼시 등 부자 동네 부동산 가운데 약 2억8400만 파운드(4600억여 원 정도)어치를 러시아인이 소유한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더시티가 러시아 고객에게 ‘더티 머니’를 합법화하는 서비스를 제공했기에 이런 구입이 가능하다. 켄싱턴 팰러스 가든스 거리는 런던에서 제일 비싼 지역이다. 이곳에 러시아 올리가르히로 유명하며 프로축구클럽 첼시의 소유자인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집이 있었다. 지난달 아브라모비치의 영국 내 공식 자산은 동결됐다.

지금까지 영국 정부의 수사와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2016년 당시 총리였던 보수당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런던이 올리가르히의 놀이터가 돼서는 안 된다며 관련 법을 제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동안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집권당인 보수당 내부에서조차 너무 뒤처진 제재를 비판하자 정부가 황급하게 경제범죄법을 만들어 지난달 말에 통과시켰다.

경제범죄법은 미국이나 EU가 특정 개인에 대해 제재를 부과하면 영국도 이를 그대로 부과할 수 있게 규정하고 있다. 브렉시트 후 독자적인 제재를 신속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EU의 제재를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 또 법 집행당국이 제재를 부과할 때면 부딪히는 비싼 소송료 등을 최소화했다. 당국이 정직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했다면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내용이다. 일부에서는 이 법이 늦어도 너무 늦었다고 한탄한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를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시내를 살펴보고 있다.  키이우/UPI연합뉴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9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를 방문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시내를 살펴보고 있다. 키이우/UPI연합뉴스

“10명이 비자 신청하면 1명만 내준다”

대표적인 보수지로 정부에 늘상 이민 제한을 요구해오던 일간 데일리메일은 지난달 31일 자에서 “10명이 비자를 신청하면 1명만 내준다”라는 헤드라인으로 정부 정책을 질타했다.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댄 폴란드가 250만 명이 넘는 피란민을 받았고 루마니아는 68만여 명을 수용했다(유엔난민기구(UNHCR) 4월 9일 기준 자료). 그런데 영국은 EU 27개 회원국의 우크라이나 피란민 수용 숫자와 비교해 너무나 인색하다.

EU 회원국들은 일단 우크라이나 난민을 환영한다. 이후 서류를 확인하고 최대 3년간 체류하며 일할 수 있는 ‘임시보호’ 자격을 준다. 반대로 영국은 먼저 피란민에게 체류 자격 비자를 신청하게 한다. 영국에 거주하는 친인척이 있는 우크라이나인들은 이 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비자를 신청하고 받는 데 몇 주가 걸린다는 점이다.

전쟁을 피해 황급히 나온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의 경우 여권을 지참하지 못한 사람들도 상당수다. 이 때문에 EU 회원국들은 인도적인 이유로 먼저 우크라이나인들을 받아주고 뒤에 서류 처리를 하지만 영국은 정반대이다.

목숨을 걸고 사지를 벗어난 사람들에게 비자를 신청하고 한없이 기다리라고 한다. 이러니 보수적인 신문조차 정부를 질타하기에 이르렀다. 지난달 31일을 기준으로 약 2만9100명 정도의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이 영국 체류 비자를 받았으나 실제 입국자는 채 1만 명이 안 된다고 이 신문은 추정했다.

반대로 영국 시민들은 우크라이나 난민 수용에 아주 적극적이다. 지난달 중순 피란민 수용 개설 홈피를 연 지 이틀 만에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신청했다. 유거브 설문조사에서 76%의 시민들이 우크라이나 난민을 신속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대답했다. 아주 느려 터진 정부와 크게 대비된다. 이러니 집권 여당인 보수당 의원들조차 내무부의 직무태만을 비판했다.

자유주의 가치 전파하겠다던 브렉시트

이런 상황을 보면서 브렉시트의 원래 목표를 떠올린다. 영국은 EU라는 경제·정치 블록의 규제에서 벗어나 전 세계로 자유주의적 가치를 전파하겠다며 브렉시트를 단행했다. 그런데 이번 우크라이나 피란민 수용에서 보듯이 ‘글로벌 영국’은 아직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침략을 당한 피란민도 비자를 신청해 최소 몇 주간 기다리게 한 뒤 일부만 받아 준다. 다른 EU 회원국의 신속한 수용과 너무 차이가 난다. 아울러 런던을 놀이터 삼아 검은돈을 굴리던 러시아의 올리가르히에 대한 자산 몰수나 제재도 미국이나 EU보다 한참 늦었다.

물론 영국은 미국과 함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에 강경대응을 주도했다. 미국과 관련 첩보를 공유하며 우크라이나에 1만 기의 대전차 미사일 등을 제공하고 인도적 지원 등을 합해 약 4억2500만 파운드(약 6800억 원)를 지원한다. 보리스 존슨 총리는 9일 우크라이나를 깜짝 방문해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 추가로 120대의 장갑차 등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印·太 안보역량 투입 전략도 비판받아

아울러 우크라이나 위기를 계기로 영국의 안보전략도 일부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1년 전 영국 정부는 안보전략 보고서에서 인도-태평양 세력이라며 이 지역에도 안보역량을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안보 전문가들은 영국의 위협이 러시아 등 유럽 인근에서 오는데 왜 이곳에 집중하지 않고 안보역량을 분산하는가 비판했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런 비판이 적확했음을 보여준다. ‘글로벌 영국’의 실현은 아직 멀었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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