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4%대의 고물가 속에서 50조 원대의 추경을 편성하고,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는 가운데 규제환화를 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추경으로 인해 시장에 돈이 풀리면 화폐가치가 하락하면서 물가 상승을 부추길 수 있고, 규제완화가 자칫 집값 상승을 부를 수 있어서다.
10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기획재정부와 인수위는 현재 추경 규모와 재원 마련 방법 등을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인수위에서 구체적인 추경안을 마련하면, 다음 달 10일 새 정부가 출범한 직후 국회에 제출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문제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1호 공약으로 내건 50조 원 추경이 최근 가파른 물가 상승세를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이다. 본래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는 대표적인 물가 상승 요인이다. 대규모 추경을 위해 적자국채 발행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물가를 최대한 자극하지 않고 공약을 이행해야 하는 일종의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지명된 추경호 후보자는 10일 "새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서민 생활물가와 민생 안정"이라면서도 "추경을 중단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현재 인수위가 추경 재원 마련을 위해 가장 우선으로 검토하는 방안은 지출 구조조정이다. 올해 607조7000억 원의 본예산 중 300조 원가량의 재량지출을 조정해 재원 상당 부분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반드시 지출해야 하는 경직적 예산인 인건비, 국방비 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구조조정이 가능한 규모는 10조 원 안팎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결국, 추경을 위해선 나랏빚을 늘려 재원을 채우는 적자국채 발행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다만, 8일 서울 채권시장에서 3년 만기 국고채 금리는 연 2.987%를 기록하면서 2013년 12월 12일(연 3.006%)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올라갔다. 국채금리가 높으면 국채를 발행하는 데에 기존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이 소요돼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
높은 물가를 잡기 위해 한국은행이 오는 14일 기준금리를 올릴 가능성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새 정부가 오히려 물가를 자극하는 대규모 추경을 추진하는 것이 '정책 엇박자'라는 지적도 나온다. 안철수 인수위원장은 지난달 30일 브리핑에서 "우리나라는 인플레이션이 심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렸는데, 손실보상 때문에 확장재정을 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고 설명했다.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고물가 상황에서 추경의 규모나 시기를 조절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50조 추경을 위해 국채를 발행하고, 이로 인해 통화량이 늘어나게 되면 물가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며 "국채를 발행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30조 규모로 1차 추경을 하고, 하반기 이후에 나머지 20조 추경을 통해 공약을 지키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도 "유동성 회수를 통한 물가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어서 대규모 추경에 대한 부담은 상당하다"며 "우선 소상공인 손실 규모를 추계하고 그에 맞게 최대한 지출 구조조정을 통해 재원을 조달하되, 국채 발행은 최소화하는 게 맞다"고 지적했다.
부동산 규제완화도 난제다. 각종 규제를 풀어 공급을 늘리면 장기적으로 시장이 기능을 회복하면서 정상화될 가능성이 크지만, 단기적으로는 규제 완화가 호재가 돼 집값을 자극할 수 있다. 약속을 무시할 수 없고 지키자니 시장이 불안해지는 진퇴양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