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봄을 기다리는 나목(裸木)

입력 2022-04-0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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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현 누가광명의원 원장

박완서 작가의 첫 소설 ‘나목’은 6·25 전쟁 때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잠시 박수근 화가와 일했던 경험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이 전쟁은 이 모든 재앙을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눠준 다음에야 끝이 날 것이다.’-나목 中

소설 속 주인공 이경(李炅)은 전쟁통에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부서의 점원으로 일한다. 미군들이 가져다주는 사진 속 연인의 얼굴을 손수건에 그려주는 일을 하는 초상화부에 어느 날 간판쟁이가 아닌 화가 옥희도가 들어온다. 이경과 옥희도는 서로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이미 결혼하여 다섯 명의 아이들이 있고, 게다가 딸과도 같은 나이의 이경과는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임을 알고 옥희도는 뒤로 숨어버린다. 그를 숨게 한 것은 그림을 그리고 싶은 열망 때문이기도 하였다. 자신을 피하는 옥희도의 그림을 본 이경은 더욱 절망한다. 이경이 본 옥희도의 그림은 메마르고 앙상한 나무 한 그루였다.

세월이 흘러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살던 이경은 신문에서 고(故) 옥희도 화가의 유고전이 열린다는 기사를 접한다. 그리고 전시회를 찾아 예전에 그녀가 봤던 그 황량하고 초라한 나무는 말라 비틀어진 고목(枯木)이 아니라 봄을 기다리는 나목(裸木)이었음을 발견한다. 이 화가는 전쟁이 온 나라에 골고루 재앙을 나누어주는 동안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않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환쟁이 일에 뛰어들고 예술가의 삶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전쟁 같은 나날이다. 증상이 있는 환자에게 신속항원검사를 하면 죄다 양성이다. 동선을 분리하여 저만치 먼 한쪽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환자에게 가서 양성이라고, 이제부터 7일간 격리해야 하고 약을 드리겠노라고 전한다. 수시로 자가격리 중인 환자들이 걸어오는 전화를 받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환자의 증상을 듣고 처방을 한다. 팍스로비드를 처방해야 하는 환자는 거쳐야 할 절차가 복잡하다. 병용 약물을 모두 알아야 이 약을 처방할 수 있을지 어떤 약은 복용을 멈춰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간기능과 신기능이 안 좋은 분들에게는 용량의 조절이 필요해 건강기록 앱을 깔게 하고 수많은 동의 절차를 거쳐 최근 혈액검사 결과들을 알아내야 한다. 신기능이 떨어진 노인들에게는 용량을 낮췄다는 것을 약국에 알린다. 이 과정이 몇 번 반복되다 보면 이 상황이 마치 전쟁터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팍스로비드를 썼던 고령의 환자들이 다음날 좋아졌다는 것을 확인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이틀 전 관내 모든 약국에 팍스로비드가 동이 났다. 개원가의 사정이 이렇다면 중증 환자를 보는 종합병원의 현실은 더 전쟁 같을 것이다.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그동안 미치지도 않고 환장하지도 않고 봄을 기다리는 나목 같은 모습으로 견디어 내길 기도한다.

조석현 누가광명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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