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가스 공급 비상사태 조기경보 발령
독일·스페인 등 물가상승률 약 30년래 최고치
러시아가 유럽에 천연가스 결제 대금을 기존처럼 유로로 결제해도 된다고 밝혔다. 독일이 러시아의 가스 공급 차단에 대비해 비상사태 조기경보를 발령하자 바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방 제재에 맞서 가스 대금을 루블로 결제하라고 명령하면서 고조된 가스공급 중단 가능성은 일단 피했다. 그러나 유럽은 러시아발(發) 인플레이션으로 이미 몸살을 앓고 있다.
30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가스 대금을 루블이 아닌 유로로 계속 결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독일 정부는 보도자료를 통해 “푸틴 대통령이 숄츠 총리에게 가스 대금을 루블로 결제하도록 한 법률은 4월 1일부터 시행될 것”이라면서도 “지불은 유로로 이뤄진다고 설명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대금이 제재 영향을 받지 않는 가즈프롬 은행으로 송금된 후 루블로 환전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서방사회는 러시아 중앙은행을 제재했지만, 에너지 계약을 담당하는 가즈프롬 은행은 제재 대상에서 제외했다. 유럽의 대러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점을 감안해서다.
앞서 러시아는 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라면서 유럽이 이를 거부하면 가스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서방 제재로 루블 가치가 폭락하자 수요를 늘려 ‘루블화 구하기’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유럽연합(EU)과 주요 7개국(G7)은 러시아의 요구를 계약 위반이라며 거부했다. 에너지 공급대금은 계약서에 적혀있는 대로 오로지 유로화나 달러화로 결제한다고 맞섰다.
푸틴 대통령이 중앙은행과 국영 가스수출업체 가스프롬에 루블화 결제 전환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31일이 다가오면서 긴장은 고조됐다. 독일은 이날 가스 공급 비상사태 조기경보를 발령했다. 독일의 3단계 가스 비상계획 중 1단계 조치로,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중단할 경우 천연가스 배급에 나서게 된다.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 수요의 55%를 수입하고 있다.
로버트 하벡 독일 경제장관은 성명을 내고 “러시아와의 갈등 고조에 대비해 예방조치를 강화해야 한다”며 위기 대응팀이 소집됐다고 밝혔다.
일단 러시아가 한발 물러서면서 유럽은 당장 러시아산 가스공급이 중단되는 위기는 넘겼다. 그러나 러시아발 인플레이션은 이미 유럽을 강타했다.
독일의 3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7.3%로 1990년 초 통일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스페인도 3월 물가상승률이 9.8%로 집계돼 1985년 5월 이후 약 37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영국 역시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가 반영되기 전인 2월 물가상승률이 1992년 3월 이후 30년 만에 최고인 6.2%를 나타냈다.
전기, 가스, 석유 등 에너지 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한 데다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식료품 가격도 급등한 영향이다. 물가가 상승하는 가운데 경제 성장은 한층 둔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잇따른다. 독일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4.6%에서 1.8%로 대폭 하향 조정했다. 오스트리아도 올해 경제성장률이 0.4%로 쪼그라들 수 있다고 내다봤다. 물가는 뛰는데 경제는 침체하는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한편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협상이 상당한 진전을 이뤘다는 평가가 나온 지 하루 만에 낙관론이 후퇴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평화협상에 돌파구가 마련됐다고 확신할 수 없다며 전쟁 종식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었다. 미국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전력을 이동하고 있다면서도 실제 철군인지 불분명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