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의 표 대결’로 주목받은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완승을 거뒀다. 이사의 자격을 강화하는 안건 등 사모펀드 KCGI(강성부 펀드)가 낸 주주제안은 모두 부결됐다. 과거 ‘3자 연합’을 형성한 반도건설이 KCGI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고, 산업은행이 조 회장 체제에 힘을 실은 결과로 풀이된다.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은 23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한진빌딩 대강당에서 제9기 정기 주주총회를 열었다. 조 회장은 석태수 대표이사를 통해 전한 인사말에서 “올해 경영방침은 ‘그룹의 코로나19 위기 극복과 유동성 확보’로 정했다”며 “이를 바탕으로 올해를 글로벌 메가 캐리어로 나아가는 원년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이번 주총은 KCGI가 낸 주주제안에 따라 2년 만에 표 대결이 재현되며 주목받았다. 극심한 경영권 분쟁이 벌어진 2020년 주총에서 KCGI는 반도건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과 ‘3자 연합’을 결성해 조원태 회장 해임을 시도했지만, 표 대결에서 패배한 바 있다.
올해 주총에는 의결권 있는 주식의 87.28%가 참석했다. 주총 시작 직후 한 주주가 “의안을 박수로 통과시키자”고 제안하자 KCGI 측 대리인이 “의사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투표용지 방식으로 표결하자”고 맞받는 등 양측의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KCGI가 낸 주주제안은 크게 △사외이사 서윤석 선임의 건 △전자투표 도입 △이사 자격 강화 등으로 구성됐다. 이들 안건은 가결에 필요한 찬성표를 얻지 못하며 부결됐다.
먼저 서윤석 이화여자대학교 경영학과 명예교수를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내용의 안건은 25.02%의 찬성을 받는 데 그치며 부결됐다. 반면, 한진칼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의 추천을 받은 주인기, 주순식 사외이사 선임의 건은 각각 60.59%의 찬성을 받아 가결됐다. 사 측은 사외이사 후보로 신성환 홍익대 교수도 추천했는데, 신 교수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합류하며 자진해서 사퇴해 이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다.
가장 주목받은 이사의 자격 강화 안건은 53.35%의 찬성을 얻었지만, 특별 결의 요건 정족수를 충족하지 못해 부결됐다. 정관 변경을 위해서는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이 안건은 배임, 횡령 등으로 금고 이상의 실형을 확정 판결받은 인물이 이사가 될 수 없도록 정관상의 자격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주총에 참석한 KCGI 측 대리인은 “정관 변경을 통해 투명성을 확립하고 주주의 권익을 높이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자 한다”며 “이사의 자격 기준 강화는 성실성, 도덕성을 갖춘 이사에 의한 책임경영, 준법경영 체계를 확립하려는 취지”라고 지지를 호소했다.
KCGI는 주주제안 당시 과거에 물의를 빚은 조현민 ㈜한진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한 것을 놓고 “과거 후진적인 지배구조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 직격한 바 있어 해당 조항이 조 사장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임을 내비치기도 했다.
전자투표 도입 안건 역시 57.85%의 찬성을 얻었지만 부결됐다. 다만, 정관 변경 안건에는 반도건설을 비롯해 외국계 주주가 찬성표를 던지며 50% 이상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번 주총 결과는 예견된 일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주주 구성만 놓고 보면 KCGI 측 지분이 조 회장 우호 지분보다 크지만, 2년 전과 달리 반도건설과 공식적인 연합을 형성하지 않았고 산업은행까지 새로운 주주로 합류해서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현재 한진칼에서 옛 ‘3자 연합’ 측이 보유한 지분은 △그레이스홀딩스(KCGI) 17.41% △대호개발(반도건설) 17.02% △조현아 전 부사장 2.06% 등 36.49%에 달한다. 하지만 KCGI가 제안한 서윤석 이사 선임 안건에서 나온 찬성표는 25%에 그쳤다. 결과적으로 반도건설이 2년 전과 달리 KCGI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산업은행도 변수였다. 산업은행은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지원하기 위해 한진칼에 8000억 원을 투입해 지분 10.58%를 확보한 상태다. 조원태 회장 측 우호 지분은 △조 회장 등 특수관계인 18.87% △델타항공 13.21% 등 32.08% 수준이다. 산은이 조 회장 편에 서면 지분 구조는 42.66%로 늘어나 KCGI에 앞선다.
산은은 이번 주총에서도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대신 조 회장 체제에 힘을 실었다. 업계에서는 공정위의 조건부 승인으로 대형항공사(FSC) 합병이 7부 능선을 넘은 상황에서 산은이 지주사의 경영권을 흔들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