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진의 한반도와 세계]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한 콜

입력 2022-03-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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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1982년 정권을 이양받은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은 시정연설에서 사민당의 동방정책(Ostpolitik)을 계승하겠다는 발언을 하여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이후 콜 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동서독 간에 맺어온 협정들을 파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들을 근거로 동독과의 협력을 지속하였다. 1983년과 1984년에는 각 10억 마르크에 이르는 차관을 지원하기도 하였으며 동독으로부터의 이주 합법화, 접경지역 내 자동발사장치 제거, 환경 및 과학기술 협력 확대 등의 반대급부를 얻어내기도 하였다.

콜 정부가 통일을 이뤄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 동방정책의 유지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콜 총리가 이처럼 이전 정부, 그것도 진보 정부의 정책을 유지하게 된 배경에는 ‘평화 공존’이라는 가치가 숨겨져 있었다.

1950년대 아데나워 정부 시절 서독은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 대동독 강경정책을 펼쳤다. 동독의 국가성을 부인하면서 할슈타인 원칙을 통해 동독을 외교적으로 철저히 고립시켰다. 그러나 힘을 바탕으로 한 정책은 동서독 간 대결을 격화시켰고, 급기야 동독은 베를린 장벽을 구축하였다. 분단구조는 더욱 심화되었고 분단으로 인한 주민들의 고통은 늘어났다.

브란트의 사민당 정부는 동방정책을 통해 대결보다는 공존을 택했다. 당장 통일이 되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분단의 장기화로 인한 고통을 해소하고 양 독 간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동독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동독을 적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접촉을 통해 변화시키려 하였다. 할슈타인 원칙을 내려놓고 소련 및 동구권과도 외교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분단을 해소하기 위해 소련과의 관계 개선은 현실적인 선택이었고, 훗날 소련이 동서독 통일을 승인하는 결정적 시발점으로 작용하였다.

콜 정부가 보수 진영의 비판을 감수하면서 대동독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려 했던 배경은 무엇인가? 동방정책이 일궈놓은 평화공존의 토대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1980년대 다시 불거진 신냉전 시기에 콜 정부가 힘과 대결의 정책으로 회귀했더라면 탈냉전의 시대적 조류 속에서 분단구조를 깨뜨려 내지 못했을 것이다. 통일을 했더라도 전 세계 유례없는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콜 총리는 동독 공산당 서기장 호네커와의 여러 차례 정상회동을 통해 냉전 구도 아래에서 동서독 분단선이 미소 핵전쟁의 대리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설득하고 동서독 협력 관계의 지속을 위해 노력했다.

이제 대한민국에 새 정부가 곧 출범한다. 새 정부의 대북정책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하노이 회담 이후 북한은 북미대화뿐 아니라 남북대화를 거부하면서 올해 들어 10차례의 미사일 발사를 단행했다. 또한 최대 사거리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가 임박했다는 징후가 관측되고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다시 복구하고 있다는 정황도 보인다.북한이 모라토리엄으로 설정해 놓은 핵과 ICBM 시험을 재개한다면 한반도 안보 상황은 매우 불안정하게 될 것이다. 새 정부의 대북정책은 상당히 보수적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되고 전 세계 안보와 경제에도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미중 갈등에 이어 미러 갈등까지 중첩되어 나타난다면 한반도가 신냉전 구도의 대결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문재인 정부가 마지막까지 평화정책과 남북관계의 끈을 놓지 않고자 했던 것은 신냉전 구도가 도래하면 분단구조가 영속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냉전 구도가 정착되면 진영논리에 매몰되고 우리는 평화 정착의 기회를 또다시 잃어버리고 만다.

우리가 대북정책 추진에 있어 주도권을 잃게 되면 강대국 간의 이해관계 속에서 평화체제 구축의 기회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보다는 북한이 레드라인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비확산 체제로 관리하려 할 것이고, 중국은 북한을 신냉전 구도의 완충지대로 관리하려 할 것이다. 일본은 한반도의 긴장 상황을 유지하여 군사대국화의 야심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우리 새 정부는 북한의 긴장 조성 행위에 단호하게 대응하면서도 북한과의 대화의 문을 닫아서는 안 된다. 이전 정부 대북정책의 과는 개선하되, 공은 계승해야 한다. 콜 총리는 분단구조의 장기화 속에서도 동방정책에서 이뤄 놓은 평화공존의 과실들을 활용하였다. 신냉전 구도에도 대화를 통한 대동독 접근을 멈추지 않았다. 분단국 통일정책에서 실용주의와 일관성 유지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독일의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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