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불안에 지속해서 강하게 노출되면 범불안장애, 사회불안 장애, 공황장애, 혹은 강박 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로 악화하여 삶이 고통스러워진다. 최근에 주위에서 이런 마음의 병을 얻어 고통받는 분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제, 토끼는 물론 맹수까지 통제할 수 있어서 천적이 없는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인간이 올라섰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불안에 시달린다. 왜일까?
인간은 수렵채집으로 씨족을 이루어 살다가 농경사회가 되어 큰 마을을 만들었고, 그리고 산업사회가 되면서는 대도시에 운집하게 되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비좁게 살다 보니 공간과 자원에 대한 경쟁과 갈등도 점점 더 심해졌다. 결국엔 인간의 천적은 바로 옆의 인간이 되어 버린 형국이다. 예전과 다르게 서로를 믿지 못하고 가까이 사귀는 것에 불안을 품게 되었다. 아마도 과도한 공동체 밀집이 이미 우리 개인의 생태적 관계에 대한 수용의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관계에 목마르다. 그래서 옆집에 누가 사는지는 애써 외면하면서도 밤늦도록 사이버 공간을 뒤지며 억압된 관계적 본능과 불안을 해소한다. 불안은 이유 없이 오지 않는다. 코로나가 지나가더라도 산불이 꺼지고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더라도 불안은 여전히 밀려온다, 파도처럼.
바닷가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위안과 평온을 느낄 수 있다. 파도를 멀리서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도 그렇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만드는 불안의 파동에 적당한 거리조절이 가능하다면 짜증과 고통 대신에 위안의 공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우리가 배운 것이다.
황정우 지역사회전환시설 우리마을 시설장·한국정신건강사회복지사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