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마지막 순댓국

입력 2022-03-0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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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석현 누가광명의원 원장

천식 환자였던 K 할아버지는 진료가 끝난 뒤에도 나가지 않고 나를 찾은 다른 목적을 말하곤 했다.

“조 원장, 만 원만 꿔줘. 점심값이 없어.” “오천 원만. 약값 내고 나면 차비가 없어.”

어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깊은 주름에 반밖에 남아 있지 않은 치아를 드러내고 익살스럽게 웃으며 점심값이니 차비를 요구하는 K 할아버지가 그렇게 밉지 않았기에 나는 오천 원, 만 원씩 빌려주었다. 그렇게 그의 차트에는 주증상, 검사내용, 처방 말고도 그가 빌려 간 돈의 액수도 쓰여 있었다. 이 대부업에도 원칙이 있어 미수금이 4만 원을 넘지 않게 했다. 조금이라도 갚아야 그다음 대출이 일어나게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K 할아버지의 빈 치아 틈새로 ‘만 원만’이라는 소리가 새어 나왔고 나는 대출 한도를 넘겨서 안 된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럼 점심 한 끼 사 줘.”

그러면서 그의 반쯤 남은 치아를 드러내며 익살스럽게 웃어 보였다. 때가 점심때인지라 그럼 그렇게 하자며 K 할아버지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장어구이를 사 달라는 할아버지를 나는 장어 싫어한다고 설득해 순댓국을 먹으러 갔다.

신호가 얼마 남지 않은 건널목을 넘어갈 때 할아버지는 숨이 차서 쌕쌕거렸다. 진료실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심한 천식이었다. 진료실에 들어와 앉아서 숨이 차다고 할 때 다가왔던 증상보다 함께 걸으며 직접 들은 쌕쌕거림의 강도는 더 심했고 선명했다. 다음 내원 시에는 약을 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쯤 남은 치아 사이로 흘리는 국물을 연신 휴지로 닦아가며 K 할아버지는 순댓국 한 그릇을 뚝딱 하셨다. 나는 내심 진료실에서 못한 할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정작 할아버지는 순댓국 먹는 것에 오로지 집중하셨다. 그것이 K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나중에 들려온 소식은 치매가 심해져 멀리 지방에 있는 요양원으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아직 미수금이 남았는데…. 아마 내게 돈을 꾸던 것도 치매 증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문득문득 할아버지의 주름이 깊게 파이는 익살스러운 웃음이 보고 싶을 줄 알았으면, 좀 더 비싼 장어구이를 사 드릴 걸 그랬다. 오늘 점심은 순댓국을 먹으러 갈 거다.조석현 누가광명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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