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주 연속 유출 마감, 160억 달러 증발
미 연준 긴축 가속에 우크라이나 긴장감 더해진 탓
규제 강화에 은행 대신 그림자금융에 빌린 기업 자금 늘어 우려
위험 신호를 가장 먼저 알려준다는 의미로 ‘탄광의 카나리아’로 불리는 미국 저등급 채권(사채) 시장에서 자금 유출이 확산하고 있다. 시장은 세계 경제가 다시 후퇴하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7일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미국 금융조사업체 EPFR글로벌을 인용해 지난달 24일부터 이달 2일까지 일주일 새 ‘BB’ 등급 이하 미국 저등급채 펀드에서 11억9000만 달러(약 1조4595억 원)가 유출됐다고 보도했다. 주간으로는 8주 연속 유출로, 이 기간 160억 달러 넘는 자본이 새 나간 것으로 집계됐다.
사채 가격이 내려가면서 금리는 크게 올랐다. 이달 미 국채 금리와 사채 금리 간 스프레드는 3.89%까지 벌어져 지난달 말 3.10%에서 0.79%포인트 확대됐다.
미국 저등급채 시장은 세계 경기가 침체하거나 후퇴할 때마다 가장 먼저 자금 유출이 발생해 흔들리던 곳이다.
이번 유출의 직접적인 원인은 기준금리 인상을 예고한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긴축 가속이다. 지난주 제롬 파월 미 연준 의장은 의회에 출석해 이달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게 적절하다고 밝혔다. 파월 의장은 “높은 인플레이션이 식량과 주택, 교통과 같은 필수품의 높은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가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며 “금리 인상이 시작하면 자산 보유 규모도 줄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지난달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저등급채 시장에서 유출 규모는 한층 확대됐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양국은 두 차례에 걸쳐 평화회담을 했지만, 약속한 휴전 기간에도 러시아군이 포격을 감행하면서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대피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 등 전황은 더 격렬해지고 있다.
조만간 열릴 3차 회담에 대한 기대감도 그다지 크지 않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의 미하일로 포돌랴크 고문은 “양측 모두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어 협상이 쉽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즈호증권의 오오하시 히데토시 수석 투자전략가는 “저등급채 펀드의 헤지가 멈추지 않는 것은 우크라이나 사태 장기화로 세계 경기가 리세션에 빠질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시장구조 변화로 인해 미국 채권시장의 취약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라고 닛케이는 짚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내 금융 규제가 강화해 대출이 어려워지자 기업들이 대출 창구를 기존 은행에서 투자신탁 등 이른바 그림자금융으로 이동한 것이다. 저등급채에 대한 기업들의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해당 시장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과거보다 커졌다. 실제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발생했던 2020년 초반 개인투자자들이 투자신탁 물량을 대거 처분하면서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다이와증권의 다니에이 이치로 수석 투자전략가는 “채권시장이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주식시장보다 훨씬 크다”며 “기업의 자금 조달에 직결된 만큼 이 시장이 무너지면 기업 심리가 단번에 악화해 경기가 하강할 수 있다”고 경종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