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사회 반대에도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행한 러시아에 대해 미국과 유럽이 경제와 금융 제재를 대폭 강화하며 극약 처방을 내렸다. 러시아의 대형 은행을 국제 결제망에서 배제하고, 더 나아가 러시아 중앙은행에도 제재를 발동, 루블화를 휴지 조각으로 만들겠다는 속셈으로 읽힌다.
미국과 유럽은 27일 러시아 일부 은행을 국제결제망인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배제키로 했다. SWIFT란 은행 등 금융기관을 연결하는 정보통신 서비스 운영 단체로, ‘Society for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munication’의 약자다. 1973년 협동조합 형태로 출범해 전 세계 은행 등 금융기관이 출자하고 있다. 본부는 벨기에에 있으며 200여 개국·지역의 1만1000개 이상의 금융기관이 이용한다. 국경을 초월해 송금 정보를 교환하는 인프라로 해외송금의 사실상 국제표준이 되고 있다. SWIFT에서 배제되면 국제송금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최근에는 경제제재 수단으로 활용된다.
이번에 미국은 러시아 최대 은행인 즈베르방크 등에 대해 달러 거래를 제한하는 개별 제재를 부과했다. 여기다 SWIFT에서도 퇴출하면 달러는 물론이고 유로와 엔, 위안, 루블과 모든 통화로 결제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이미 이를 통해 효과를 본 전적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계획으로 긴장이 높아진 2012년과 2018년 미국과 유럽은 제재의 일환으로 이란을 SWIFT에서 퇴출했다. 그러자 이란의 국내총생산(GDP)은 2018년 마이너스(-)6%로 대폭 떨어졌다.
러시아에 대한 제재는 이란에 비해 세계적으로 미치는 충격이 크다. 이란의 GDP는 약 1920억 달러(2020년 기준)에 불과하지만, 러시아는 약 1조4840억 달러로 경제 규모가 이란의 약 8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유럽은 에너지 조달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으며 천연가스의 40%는 러시아산이다. SWIFT에서 배제돼 러시아 경제 활동에 영향을 주면 에너지 조달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독일이 자국과 러시아 간 직결 파이프라인인 ‘노르트스트림-2’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수출을 단행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러시아의 SWIFT 퇴출을 찬성하지 않은 이유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독일 등 유럽이 미국의 극약 처방에 동조하고 나선 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공격을 멈추기는커녕 더 격렬해졌기 때문이다. 유럽 주요 도시에서도 반러, 우크라이나 지지 시위가 급속히 번지고, 제재에 신중했던 이탈리아와 헝가리도 SWIFT에서 러시아 배제가 불가피하다고 나서면서 독일도 입장을 달리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결정타는 대러시아 제재 부작용을 억제하는 구조가 성립됐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모든 은행을 SWIFT에서 배제하면 구매하는 천연가스 대금을 지불할 수 없게 돼 조달에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데, 대형 은행만을 대상으로 함으로써 최소한의 경제 관계를 유지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처방에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멈추지 않을 경우, 서방국들의 제재 강도는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유럽은 제재 효과를 강화하기 위해 러시아 중앙은행에도 제재를 부과해 환율 개입을 할 수 없게 했다. 유럽 내 중립국인 스위스도 사실상 대 러시아 제재에 동참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이에 따라 투기 세력들이 루블화 매도에 나서면서 통화 가치가 폭락 조짐이다. 실제로 루블화 가치는 지난 24일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고, 28일에는 역외 시장에서 달러당 루블화 환율이 장중 117.817루블을 기록하며 전 거래일 종가 대비 약 28% 하락했다.
통화 가치가 급락하면 수입품 가격이 올라 당장 생활비 부담이 커진다. 러시아는 이미 인플레이션율이 8%대까지 높아져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 전쟁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유럽시장에서 금융거래 결제를 담당하는 청산기구 ‘클리어스트림’이 러시아 주식과 채권 등 루블화 표시 거래를 멈추기 시작했으며, 이에 러시아 정부와 기업의 자금 조달에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그러나 루블화 가치의 급락은 유럽 경제에도 리스크가 된다. 러시아 여신잔고(1000억 달러)로 보면 유럽이 70%를 차지하고, 여기에는 은행 경영 체력이 약한 이탈리아도 포함돼 있어 연쇄 부실 우려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