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성의 해외법인들도 그룹의 애국보훈 활동에 맞춘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효성USA는 2013년부터 사업장이 있는 앨라배마주 인근의 조지아·테네시 주 거주 6·25 참전 퇴역군인들을 위한 사은행사를 열고 있다. 한국 기업으로는 최초였다. 효성 중국법인은 절강성 가흥시에 방치되어 있던 백범 김구 선생의 피난처를 복원하고 유지관리까지 맡은 바 있다.
애국보훈을 기업문화로 가꾸자는 효성의 다짐은 창업주 조홍제(1906~1984) 회장의 항일저항 운동과 뿌리를 같이한다. 19세의 늦은 나이에 중앙고보에 입학했던 만학도 조홍제 회장은 1926년 6·10만세운동 때 주모자로 몰려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옥살이 중 발가벗긴 채 형틀에 거꾸로 매달려 채찍으로 얻어맞는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만석꾼집 금수저 아드님이 당할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고문보다 나라 없는 것이 더 서럽고 아팠다고 했다. 한 해 뒤인 1927년에는 동맹휴학을 주동했다가 퇴학을 당하는 등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저항운동을 계속했다. 당시 체포된 19명의 명단은 1926년 6월 19일자 동아일보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라디오 방송을 듣고 가장 먼저 한 일은 10살 된 맏이 조석래를 무릎에 앉히고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에 맞춰 애국가를 가르쳐 준 일이었다고 한다. 식민지 청년의 가슴에 목청껏 소리쳐 부르는 애국가 이상의 로망이 또 어디에 있었을까?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우는 부산 청십자 의료협동조합 장기려(1911~1995) 박사와의 인연도 남다르다. 담낭에 이상이 생겨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던 조 회장을 장 박사가 수술해 건강을 회복하게 했다. 조 회장은 사례로 당시 집 한 채 값인1백만 원을 장 박사에게 줬는데 장 박사는 이 돈으로 조직 호흡을 측정하는 ‘왈부르크’라는 의료기기를 사서 부산의대에 기증했다. 또 마땅한 거처가 없이 부산과 서울을 왕래하는 장기려 박사를 위해 서울 명륜동 집을 비워줬다. 많은 돈이나 큰 집이 결국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장기려 박사의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조 회장에게 나라는 회사보다 크고 더 위에 있는 사업체나 마찬가지였다.
해방의 그날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애국가를 따라 배웠던 장남 조석래에게도 나라는 자신의 삶을 완성시키는 소중한 존재였다.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대사관 앞에서 천막을 쳐 놓고 밤샘을 하던 우리 국민들의 훼손된 자존심을 그는 한미비자면제협정을 통해 회복시켰다. 그가 비자면제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은 1996년, 그리고 2008년 10월 17일 미국 정부가 비자면제 프로그램의 신규 가입국 명단에 우리나라를 포함시킬 때까지 그는 12년을 매달려 우리 국민의 자부심을 되살려줬다. 바쁜 회사 일을 챙기는 와중에도 한미재계회의 의장, 한일경제협회장,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국제의장 등 재계의 국제부장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제적 위상과 신인도를 높이는 데 전력을 다했다. 나라가 잘되는 것이 결국 자기 사업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설화에 휘말렸던 ‘경제를 잘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다’는 그의 발언도 따지고 보면 나라를 위해 할 말을 한 셈이다. 군인이 ‘안보를 잘 아는 대통령’을 선호하고 노동조합이 ‘노동을 잘 이해하는 대통령’을 원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세상에서 그는 경제인이 할 말을 나라를 위해 당당하게 했다.
효성가(家)의 3세 조현준 회장은 2017년 취임했다. 그의 취임 후 4년 만에 매출은 12조 원에서 21조 원이 됐고 영업이익은 거의 세 배로 뛰었다. 팬데믹을 넘은 값진 성과였다. 그런데도 나라는 정지된 것 같은 상황이 3년째 이어지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라도 사태가 안정되어 현충원이 다시 개방된다면 효성그룹 사장단의 참배도 다시 이루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선 조현준 회장의 모습을 기업의 성장과 함께 애국보훈을 실천하는 효성 기업문화의 상징으로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