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미국 주재 에밀리 하버 독일대사는 본국에 위 내용을 담은 비밀 전문을 보냈고 이는 곧 언론에 공개됐다. 우크라이나 위기에서 독일은 미국과 영국 주도의 강경 대응을 저지하며 무기 제공도 반대해 왔다. 하버 대사는 독일이 러시아로부터 계속해서 값싼 천연가스를 얻고자 하기에 이처럼 행동한다며 베를린이 푸틴과 동침 중이라 여긴다는 미국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렇다면 미국 일각에서 보는 것처럼 우크라이나 위기에서 독일이 이상하게 행동하는가? 외교는 국익과 국가 정체성을 실현하는 정책이다. 독일이 이런 정책을 실행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과 현재의 국내 정치적 상황, 경제적 측면에서 검토해야 한다. 미국 주도의 강경 대응책을 따르지 않는다고 독일을 백안시하는 것은 지나친 단견이다.
동방정책의 지속과 신호등 연정의 복잡한 셈법
동방정책은 독일 외교정책의 주요 축 중 하나이다. 1970년대 초 당시 사회민주당(사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소련 등 동구 공산권과의 관계 정상화 및 확대에 나섰다. 이 정책은 ‘접촉을 통한 변화’를 목표로 했다. 소련 등 공산권과 계속해 대화하면서 공산국가의 내부 변화를 꾀한다는 것이다. 1982년 10월 중도우파의 기독교민주당(기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후에도 기민당은 이 정책을 계승했다. 냉전 시기 동서독으로 나누어진 분단국가였고 미소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독일(서독)은 이 정책을 실행해 외교적 지평을 넓혔고 결국 통일도 이룰 수 있었다.
탈냉전 시대에도 독일은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동방정책을 계속 실행해왔다. 통상국가이자 동방정책 덕분에 독일은 서방국가 가운데 대러시아 교역 비중이 꽤 높다. 2020년 말을 기준으로 독일 수출의 2%가 러시아로 가는데 이는 미국이나 영국보다 4배 높다. 그만큼 독일과 러시아 경제가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대표적인 게 북해 가스 파이프라인, 노르트스트림 2(Nordstream 2)이다. 러시아 천연가스를 발트해를 거쳐 독일로 직접 운송하는 1230㎞의 파이프라인이다. 지난해 6월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관련 제재를 해제했다. 현재 독일 규제 당국의 승인만 받으면 이 파이프라인은 가동된다.
독일은 가스의 절반 정도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어 다른 유럽국가가 3분의 1 정도를 러시아에 기대고 있는 것과 비교해 의존도가 높다. 당연히 미국과 영국 등 나토 동맹국들은 이 파이프라인을 제재 대상에 올리고 푸틴을 압박하고자 한다. 반면에 독일은 최악의 경우 제재에 찬성하지만 벌써부터 이를 올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끝까지 러시아와 대화를 계속하고자 한다.
현재 연립정부(연정)를 구성 중인 녹색당은 인권을 중시하며 대러시아 강경정책을 지지하지만, 우크라이나에 무기 제공을 반대한다. 반면에 친기업적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은 러시아와의 교역 지속을 찬성한다. 따라서 동방정책을 계승한 사민당의 올라프 숄츠 총리가 보기에 대러시아 강경정책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자칫 이 문제를 건드리면 연정 내 갈등이 커진다.
2차대전, 러시아에 역사적 부채의식
동방정책과 경제적 이득, 그리고 신호등 연정 안의 복잡한 셈법 이외에 독일은 러시아에 일종의 역사적 부채 의식을 지니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때 스탈린 전투에서 소련인 120만 명이 사망한 것을 비롯해 소련은 독일 침략전쟁의 주요 희생자였다.
또 독일의 기본법(헌법) 26조는 침략전쟁(준비)은 위헌이며 처벌한다고 규정한다. 독일은 이 조항을 근거로 분쟁지역에 무기 판매나 제공을 금지하며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해제할 수 있다. 현재 신호등 연정에서 대체적인 분위기는 아직 해제가 아니다. 양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평화헌법이고 독일에서 평화주의, 반전사상은 뿌리가 깊다.
여론도 현재 정부의 대응을 지지한다. 여론조사업체 알렌스바흐가 1일 공개한 연례 안보 보고서를 보면 응답자의 70%가 물가상승을 가장 크게 우려했다. 그 다음이 코로나19가 경제에 끼친 영향이고, 3위가 우크라이나 위기였다. 독일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은 중국이 아니라 러시아라고 시민들은 여겼다. 즉 시민들은 우크라이나 위기를 인식하고 있지만, 삶에 직접 영향이 있는 물가 오름세를 더 걱정한다.
강경 대응한다고 푸틴이 침략하지 않을까?
또 하나는 1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에 전진 배치한 푸틴 대통령이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로부터 아무런 양보도 얻어내지 못하고 철군할까 하는 점이다. 푸틴은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등 구소련의 세력권 안에 있다가 나토 회원국이 된 국가의 나토 탈퇴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금지를 요구했다. 당연히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현실적으로 보면 푸틴은 양보할 이유가 거의 없다.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현대 러시아의 시조가 된 공국이 출범했고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곳이다. 최악의 경우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전부터 동부 친러 지역인 돈바스 지역의 점령 확대 등 소규모 침략까지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온다.
냉전시대의 기억, 동유럽 안보불안 가중
냉전시대 소련의 압제하에서 신음한 동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위기에서 심각한 안보 불안을 느낀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략을 받는데 미국이나 유럽의 국가들이 수수방관한다면 다음은 누가 희생자가 될 것인가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온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도 아니고 군사동맹국도 아니기에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참전할 수 없다고 미국과 나토 모두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미국은 인접국가의 안보 불안을 해소하려고 폴란드 등에 수천 명의 군을 파견했다. 그렇기에 러시아를 국제결제시스템에서 배제하고 푸틴의 최측근들까지 제재에 포함하는 최고 수위의 제재를 준비 중이다.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도 대러시아 제재를 준비해왔다. 다만 독일이 대화를 지속하자며 제재 시기와 방식 등에서 브레이크를 걸고 있다.
2014년 3월 푸틴이 크림 반도를 전격 합병하자 당시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대러 강경 제재를 주도하고 실행했다. 이후에도 메르켈은 푸틴과 수시로 만나 대화를 지속했다. EU 최대의 경제대국이자 유럽통합을 이끄는 독일에 걸맞은 외교정책이었다. 현재 독일의 신호등 연정은 당시의 메르켈 정책과 크게 대비된다. EU에서 대러시아 제재도 주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방해한다. 숄츠 총리는 7일 미국을 공식 방문해 러시아의 침략 시 동맹국들과 함께 일치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침략 시 노르트스트름 2 폐쇄를 언급하자 숄츠는 현장에서 즉답을 피했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지난달 29일 자에서 “푸틴은 우크라이나의 평화에 관심이 없는데 왜 독일이 이곳에 침략에 대비하는 무기를 공급한다고 평화를 해치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어 독일의 무기 제공 거부는 나토의 대러시아 침략 억지 정책을 해치고 오히려 푸틴을 격려한다고 규탄했다.
독일 정부의 현 입장을 이해하지만, 이 정책은 우크라이나의 상황 전개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분쟁지역 무기 판매 금지도 독일 내 여론이 변하면 의회에서 해제된 적이 몇 번 있다. 미국과 EU는 자유와 인권, 평화를 존중하는 가치 공동체이다. 그런데 이런 가치를 파괴하려는 러시아 앞에서 독일은 지나치게 주저한다.
우크라이나 위기로 지정학적 리스크는 커지면서 유가와 원자재 가격이 고공행진 중이다. 우리의 대러시아 수출 중 44%가 자동차와 부품이 차지한다. 공급망 병목 현상이 해소되지 않았는데 제재까지 부과된다면 대외 의존도가 높은 우리에게 큰 부담이 된다.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