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건 회장의 뒤를 이은 최종현 회장은 경영자로서의 걸출한 능력뿐 아니라 기업의 사회공헌에도 탁월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인재 양성을 그의 평생의 테마로 택했다. 한정된 자원을 집중해 성과를 내게 하겠다는 경영자다운 발상이었다. 그리고 나무를 심었다. 30년 후 나무가 자라면 인재 양성을 위한 재원으로 쓰겠다고 했다. 나무를 심은 곳은 중부 내륙지방에 있는 오지 중의 오지, 개발의 손길이 전혀 미칠 수 없게 해 온전히 나무만을 키울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국고등교육재단과 서해개발이 이를 위해 설립됐다. 개인이 아닌 법인이 사회공헌사업을 추진해야 지속가능성이 담보된다는 취지였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이 배출한 793명의 박사, 5000명에 이르는 인재와 인등산 자락에서 자라는 100만 그루의 나무는 최종현 회장의 그랜드 플랜이 만들어 낸 우리나라의 거대한 자산이 됐다.
최종건 회장의 차남 최신원 회장은 기부왕으로도 불린다. 그게 알려진 것은 국내가 아닌 해외 매체를 통해서였다. 2009년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브스가 아시아의 기부 영웅으로 그를 소개하면서부터였다. 그때까지 그는 ‘을지로 최신원’이라는 애매한 이름으로 기부를 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 수소문해 그가 SK가(家)의 일원임을 밝혀낼 때까지 그는 자신을 철저히 숨겼다. 그가 주도한 고액기부자들의 모임인 아너소사이어티는 6명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2662명의 회원에 누적 약정 금액 2874억 원에 이르는 세계적인 단체로 성장했다. 최태원 회장 등 SK가 4촌 형제들 모두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해 사회공헌을 매개로 한 훈훈한 형제애를 과시하기도 했다.
필자는 십수 년 전 어느 경제신문 기자의 전화 한 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기자는 연세대에서 한국개발연구원(KDI) 주최로 열리고 있는 사회적기업에 관한 세미나에서 최태원 회장을 봤다는 것이었다. 확인해 보니 수행비서만 알고 있는 일정이었다. 진심이 왜곡될 수 있으니 기사화는 보류시켜 달라고 했고 그 기자도 쾌히 승락했다. 당시 SK그룹 사회공헌의 테마는 소외계층 일자리 창출이었다. 행복도시락 사업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최 회장은 이를 지속 가능한 사업으로 뿌리내리려고 했고 개념조차 생소한 사회적기업에 주목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공부했다. 비서실도 모르게 KDI 세미나에 참석한 것은 그런 이유였다. 그 후 사회적기업에 관한 책을 직접 써내고 SK그룹의 사회적 가치 창출을 위한 핵심사업으로 사회적기업이 정착된 것은 최 회장의 오랜 선행학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외계층 일자리 창출과 함께 SK그룹이 앞장섰던 또 하나의 테마는 자원봉사였다. 최 회장은 사회적기업에 대한 선행학습과 함께 자원봉사에도 솔선수범했다. 어느 해인가는 겨울을 앞두고 연탄배달 봉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회장이 리어카 끄는 사진만 찍고 바로 돌아섰다는 음해성 루머를 전달해 준 기자가 있었다. 쇼만 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탄가루가 까맣게 낀 손톱 끝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줬다. 최 회장의 손톱 끝도 같을 거라고 했더니 이 루머는 사라졌다. 사실 그때까지 최고경영자(CEO)들의 사회봉사는 기부금 전달이 전부였다. 그래서 회장이 직접 하는 자원봉사는 재계에도 신선한 충격이었다. 어느 중견그룹 회장은 자신도 따라 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좋은 일의 나비효과가 생긴 것이다.
사회공헌활동(CSR)이 기업의 본령은 아니다. 기업은 어디까지나 돈을 벌어서 써야 하고, 이익을 낸 만큼 세금을 납부해 사회에 이바지할 기회가 많이 있다. 그럼에도 많은 선진국 기업들이 나름의 사회공헌활동에 열심인 것은 사회와 공존한다는 기업문화가 궁극적으로 기업의 본질적 활동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환경, 사회, 지배구조(ESG)의 시대적 명제는 기업의 차원 높은 사회적 가치 창출을 요구하고 있다. SK가 이 분야에서 대표기업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시대의 조류를 10년 이상 앞서 꿰뚫어 본 최고경영자의 예지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지는 창업주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져 가풍으로 자리 잡은 기업의 사회공헌에 대한 진정성이 바탕이 됐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