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상원에게 '평생 주연의 삶을 살아온 당신이 콘트라바스의 삶을 아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이다. 1978년 무대로 데뷔해 '인간시장(1988)', '여명의 눈동자(1991)', '모래시계(1995)' 등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작품에 출연한 그는 바이올린의 삶을 살고 있을 거라 봤다. 하지만 박상원은 "평생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다"며 손을 내저었다.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한 모노드라마였어도 풀어나가는 과정은 콘트라바스와 같았을 겁니다. 바이올린도 바이올린만의 고독이 있기 때문이죠. 제일 앞줄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외로움도 있는 법이죠. 누구나 선망의 눈길로 보고, 화려한 만큼 잘할 거라 보기 때문에 느껴지는 고통 속에 고독 같은 게 있거든요."
박상원의 '콘트라바쓰'는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희곡 '콘트라바스(1981)'를 원작으로 한다. 극은 오케스트라 셋째 줄 구석에 앉은 베이스 연주자의 독백이다. 이 커다란 현악기와 단둘이 살아가면서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마음도 표현하지 못하는 인물을 박상원이 표현한다. 더블베이스라는 중요한 악기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세상과 오케스트라에 대한 분노를 뿜어내는 극이다.
오케스트라의 어느 곳에 서 있건 '고독'과 '투쟁'은 필연적이라는 게 박상원의 생각이다. 지휘자의 손끝, 바이올린의 첫 음의 실수는 모든 관객이 알아차릴 수 있어서 고통스러울 것이고, 콘트라바스를 비롯해 뒷줄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은 오케스트라의 구조 속에서 서글픔을 느낄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것.
"그래서 '위기 의식'을 반려 감성으로 여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주머니에 손 넣고 바로 꺼낼 수 있도록 항상 갖고 다니고 있죠. 긴장하지 않을 수 없고 좀 더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말입니다."
다음은 박상원과 일문일답.
- 지난해 공연된 초연과 어떤 점이 바뀌었나.
"밀폐된 극장이란 공간에서 관객들과 호흡할 때 적절한 시간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결국, 1시간 30분 내외가 적절하단 이야기를 하게 됐죠. 보통 공연은 1막을 하고 중간에 인터미션을 가진 후 2막으로 들어가는데 '콘트라바쓰'는 그럴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또 주고받는 메시지가 있어서 그 모습이 역동적인 것도 아니에요. 한 명의 배우가 어렵고 관념적인 이야기를 홀로 말하는데 2시간씩이나 한다는 건 관객에게도 부담스러울 수 있다고 봤죠. 시간을 줄였습니다. 대신 관객의 상상에 맡길 수 있는 요소를 늘려 관객과 작품의 케미스트리를 극대화했습니다."
- 무대 위 소품도 변화가 있다고.
"축음기, 꽃, 전화기들을 없앴어요. 아, 지금 앉아계신 의자가 지난해 무대 위에 올려진 그 의자예요. 하하. 테이블 위 이 전화기도 그때 그 전화기고요. 다 없앴어요. 소품을 없애고 배우 혼자 오롯이 하는 완전한 모노 극을 추구하게 된 거죠. 몸으로 표현하던 것도 완전히 바꿨어요. 지난해와 비슷한 게 별로 없어요. 곡들도 그렇고요. 대신 생각할 여지는 10시간짜리 공연이 됐다고 확신합니다."
- 지난해 봤던 관객은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하겠다.
"초연을 본 관객은 오히려 더 극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똑같은 작품에 똑같은 배우가 나오는데 이렇게 다른 작품이 됐다는 걸 보고 놀라실 거고요. 대사는 비슷한데 표현하는 정서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 예술의전당에서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로 옮겨온 것도 변화다.
"세종문화회관은 우리나라 최고의 극장이기 때문에 최고의 극장에서 공연한다는 건 정말 흥분되는 일이에요. 1978년 4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영국 로열발레단 공연에 섰어요. 44년이 지난 지금 세종문화회관에서 관객을 만나게 됐네요."
- 배우로서 44년을 살아왔다. 가장 강렬했던 순간이 기억나는가.
"늘 새로워요.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관객이에요. 1978년 첫 무대에 섰을 때의 눈높이와 44년이 흐른 지금의 눈높이는 달라졌거든요. 관객의 눈높이는 계속 진화합니다. 기 싸움을 할 수밖에 없어요. 무대는 제게 UFC 팔각 옥타곤과 같은 존재거든요. 관객이 피를 철철 흐르며 매트에 쓰러지느냐 제가 쓰러지느냐 문제죠. 죽여주는 공연, 관객의 마음을 훔치는 공연을 만들어야 하는 게 배우의 숙명인 거고요.
- 배우 신구, 이순재 등 무대 위를 지키는 선배 배우들이 많은데.
"선배님들이 더 오래 무대에 서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저는 후배이기 때문에 그분들이 했던 높이를 필연적으로 넘어서야 하는 의무가 있고요. 또 저는 후배들에게 더 높고 어려운 목표를 줘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해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배 배우들이 오래도록 해주셨으면 하는 게 간절한 소망입니다."
-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서울예술대학교 교수, 연극 무대까지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는 원동력은.
"'인생이란 여정 속에서 늘 닿을 수 없는 것을 향해 우리는 끝없이 방랑하고 있다'는 대사가 있어요. 좌절하는 순간이 모든 것들의 마지막이 되겠지만, 아직 그다음에 뭐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끝없이 방랑하는 게 맞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엔 어떤 작품이 있을지, 무슨 드라마가 있을지 서울문화재단이 아닌 인천문화재단에서도 활동할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콘트라바쓰'가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오늘 밤 제게 일어난 일은 내일 아침 이투데이에서 알 수 있으니까요. 하하. 우리가 만나게 될 그 시간은 결국 희망이에요. 그래서 저 역시 나아갑니다."
- '콘트라바쓰'를 본 관객들이 얻어갔으면 하는 것은.
"공연을 본 후 세종문화회관 주차장을 빠져나가면서 '오랜만에 좋은 연극 한 편 봤다'고 말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공연 안엔 다양한 정서가 있는데 절망보다 희망을 느끼셨으면 해요. 그리고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든 후 활기차게 출근을 하셨으면 하고요. 그게 배우, 연출자, 제작자, 극장 사장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