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이 통일 이후 통합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녀가 동독에서 성장한 배경 때문이다. 독일 통일의 도화선이 되었던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념하는 연설에서 그녀는 항상 독일 통일의 주역은 자신과 같은 동독인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금의 독일이 있게 된 것은 동독인들의 시민혁명의 결과라고 힘주어 말했다. 소외될 수 있는 구 동독 지역의 단합을 위한 정치적 행보이기도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오히려 동서독의 지역격차 해소를 위해 더 노력할 수 있었다. 통일을 이룬 지 30년이 되는 지금 수치상으로는 여전히 구 동독 지역이 구 서독 지역의 4분의 3 정도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를 나타내고 있지만, 사실상 두 지역의 생활수준은 거의 차이가 없다. 동독 출신이라고 홀대받는 사회적 분위기는 이미 구시대적 산물이 된 지 오래다.
독일이 지난 30년 동안 통일을 이루고 통일에 따른 격차와 정서적 갈등 해소에 매진해 온 것을 보면 우리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멀다. 장기 플랜은커녕 5년마다 바뀌는 정권의 변화 속에서 대북정책은 요동친다. 분단구조의 내재화 속에서 평화·통일·공동번영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단단하지 못하다. 과거 독일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졌을 때 통독에 대해 자문해 주던 독일 지인이 나에게 조언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는 한국인들은 통일에 대한 의지가 매우 높지만 통일의 방법에 있어서는 확고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그 원인은 정책의 가변성일 것이라고 부언하였다. 대북정책이 자주 바뀐다는 것이다. 현대사의 격동기에 16년 동안 재임한 총리가 무려 두 명이나 있었고 독일 및 유럽의 통합정책에 있어서는 일관된 정책을 취해 온 독일에 비하면 통일에 더 많은 것을 쏟아야 할 우리로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영삼 정부 시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여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취하려다 북한 핵문제로 대북정책이 갈팡질팡하였다. 박근혜 정부 때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라 하여 이전 정부 대북정책의 장점을 계승한다고 하였으나 결국은 북한붕괴론에 매몰되고 말았다. 문재인 정부는 ‘통일국민협약’이라고 하여 보수·진보·중도를 아우르는 사회적 대화를 실시하고 협약안을 마련하였다. 다만 정부나 시민단체가 마련한 사회적 합의를 국민적 합의로 이끌어내는 것은 국회와 정당의 몫이다. 우리나라의 국회와 정당이 통일문제와 대북정책에 있어 대타협을 이룰 수 있을지 의문이다. 콜과 메르켈이 16년 동안 재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정치인 개인의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16년 동안 그 리더십이 유지되도록 뒷받침한 국민적 지지와 법·제도적 장치가 있었음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종전선언 문제만 해도 그렇다. 국민의 65% 정도가 종전선언 추진에 찬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중 갈등 속에서 우리의 주도적 목소리를 내고 잔뜩 움츠려 있는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카드로서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시도이다. 종전선언 추진이 정치 일정이나 당파적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고 한반도 평화를 고양하는 중요한 마중물로서 추진되고 활용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