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14. 공동 국경방어 딜레마에 빠진 유럽연합(EU)

입력 2021-11-1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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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국간 열린 국경, 그 바깥은 장벽으로 봉쇄? ‘난민 통제’ 현실과 ‘인권 중시’ 규범의 충돌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팟캐스팅 안쌤의유로톡 운영자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팟캐스팅 안쌤의유로톡 운영자
폴란드의 동북부 국경에 있는 작은 마을 우스나지 고르니(Usnarz Gorny). 이 마을이 지난 8월 초부터 국내외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아왔다. 이웃 벨라루스가 주로 이라크 난민 신청자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폴란드 국경 너머로 ‘밀쳐 보내기’ 하려 하면서 양국 정부가 충돌을 빚었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900명이 넘는 군을 이곳에 급파했고 급기야 10월부터 이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폴란드의 야당과 시민단체는 여기에 갇혀 오가지도 못하는 이라크인들에게 인도적 지원을 호소했지만 허사였다.

폴란드·벨라루스 국경의 이라크 난민

벨라루스와 국경을 맞댄 발트 3국 가운데 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도 갑자기 난민 신청자가 급증해 어려움을 겪었다. 리투아니아에 들어온 이라크 난민 신청자는 올해 7월 말까지 4100여 명 정도. 지난해보다 무려 50배가 늘었다.

유럽연합(EU) 27개국은 지난해 8월 벨라루스의 독재자 루카셴코가 부정선거로 또다시 장기집권을 하자 경제제재를 내렸다. 올해 6월 말에는 좀 더 광범위한 제재를 추가했다. 인터넷과 전자정보 통신기기의 수출을 전면 금지했고 EU 자금시장으로의 접근도 봉쇄했다. 독재자는 EU 각국이 야당 지도자들에게 망명처를 제공하자 난민을 무기로 썼다. 벨라루스 정부는 지난 6월부터 이라크의 바그다드에서 수도 민스크로 오는 항공편을 늘려 이라크인들을 이곳으로 오게 했다. 절박한 상황에 있는 이들에게 민스크로 오면 EU로 보내주겠다는 달콤한 약속을 했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벨라루스 경찰이 난민 신청자들을 국경지대로 데리고 와서 자국으로 밀어내는 영상을 공개했다. 지난 8월 폴란드는 불법적으로 월경을 시도한 2100여 명 가운데 1312명을 현장에서 저지했다. 그런데 이들을 다시 국경 너머 벨라루스로 보내려니 길이 막혀 버렸다.

그리스 등 국경 장벽 쌓기 예산 요청

EU 회원국 간에 국경은 열려 있다. 솅겐조약으로 회원국들은 국경을 개방했다. 그래야 27개 회원국 간에 상품과 서비스, 자본과 노동력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단일시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코로나19 팬데믹이 확산된 후 일부 회원국들이 국경을 봉쇄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조치이다. 국경개방으로 EU는 한 배를 탔다. 한 회원국이 밀입국자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이는 나머지 회원국들에게도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난민 신청자들이 기를 써서 그들이 원하는 회원국으로 이동하려 하기 때문이다.

지난달 21일부터 이틀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EU정상회의(유럽이사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그리스와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일부 회원국들이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겠다며 EU 예산 지원을 요구했다. 그리스는 터키나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들어오는 지중해상의 경로에 있고, 나머지 요청 국가는 벨라루스의 난민 밀어내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회의에서 격론이 오갔지만 일단 예산 지원은 승인되지 않았다. 국경에 장벽을 건설해 불법 난민을 막아내는 게 EU 모두의 이익이라는 게 요청 이유이다.

EU는 내심으로는 이 근거가 합당하다고 본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회원국의 장벽 건설을 지지할 수는 없다. 회원국 간의 장벽을 허문 열린 공동체를 지원하고 어려움에 처한 외부인을 보호한다는 인권 선진국을 외쳐 온 게 EU이기에. 하지만 폴란드는 이미 벨라루스 국경 근처에 철조망을 설치했다.

▲폴란드와 국경을 접한 벨라루스에서 8일(현지시간) 유럽행을 원하는 중동 출신 이민자들이 철조망을 넘고 있다. 난민을 포함한 이들 이주민들은 전쟁과 빈곤을 피해 중동에서 동유럽 국가 벨라루스로 건너왔으며 새 삶을 찾아 폴란드를 통해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가길 원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폴란드와 국경을 접한 벨라루스에서 8일(현지시간) 유럽행을 원하는 중동 출신 이민자들이 철조망을 넘고 있다. 난민을 포함한 이들 이주민들은 전쟁과 빈곤을 피해 중동에서 동유럽 국가 벨라루스로 건너왔으며 새 삶을 찾아 폴란드를 통해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가길 원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유럽국경해안경비대 역할 확대

이처럼 EU 27개 회원국에 한 회원국의 외부 국경은 나머지 다른 회원국에게도 공동 국경이 된다. 따라서 EU 차원의 국경수비대가 필요하다. 2004년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EU 국경관리처가 설립됐다. 회원국들이 외부 국경(비회원국과의 국경) 관리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필요할 때 서로 협력해 국경도 공동으로 관리하는 게 이 기구의 업무이다. 2015년 후반기 독일로 100만 명이 넘는 난민 신청자들이 밀려 들어오자 이 기구의 임무가 점진적으로 확대돼 왔다. 2019년 말 관련 규정이 제정돼 유럽국경해안경비대(European Border and Coast Guard Agency, EBCG, 이하 경비대)가 출범했다.

국경관리처일 때 이 기구의 인력은 600여 명에 불과했으나 지난해 말 6500여 명이 근무 중이다. 2027년까지 인력이 1만 명으로 확충된다. 예산도 2013년 1억 유로에서 지난해에는 4억 유로로 급증했다. 경비대는 첨단 드론과 각종 장비 구입도 늘렸다. 이제까지 외부 국경의 보호에서 회원국과 협력하고 도움을 제공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체 군사력도 단계적으로 갖춘다. 회원국의 국경수비대와 함께 근무하면서 난민 정보허가시스템이라는 공동 데이터베이스도 운영한다.

경비대가 난민 신청자 밀어내기 관여

그런데 경비대는 불법행위에 관여했다는 혐의로 출범 초기부터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EU의 반부패청은 지난해 12월 이 기구를 압수수색하고 회원국의 난민 신청자 밀어내기에 경비대가 관여했다고 밝혔다. 그해 10월 지중해상의 그리스와 터키의 국경 지역에서 그리스 해군이 난민 신청자들을 터키 영해 안으로 밀어내는 데 수수방관하거나 그리스 해군과 협력했다는 것. EU 법에 따르면 회원국이 난민 신청자들을 수용해 보호하고 난민 신청 절차를 개시해야 한다.

EU는 2016년 터키와 난민협약을 체결해 무자격 난민 신청자가 EU 회원국으로 올 경우 터키로 송환하고, 돌려보낸 불법 난민 신청자만큼 합법 난민을 수용하기로 합의했다. 터키는 이 대가로 60억 유로(약 8조 원)의 EU 지원을 받았다. 경비대는 또 헝가리와 세르비아의 국경지대에서도 공동 작전을 펼쳤다. 그런데 헝가리 역시 난민 신청자들을 세르비아 영토 안으로 밀어내기를 하자 방관했다는 비판을 받고 경비대는 공동 작전을 철회했다.

‘EU의 규범적 권력’ 공허한 구호로

EU는 민주주의와 소수자 보호 등의 가치를 중시하는 규범적 권력이라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EU의 난민정책은 이런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엄연히 불법인 난민 신청자 밀어내기가 자행되는데도 이를 수수방관해왔다. 유럽의회 내 사회민주당과 녹색당, 자유민주당 등은 폴란드와 그리스, 크로아티아에 대해 법 위반 조사 절차를 시작해야 한다고 지난 3월 집행위원회에 요구했다. 회원국의 EU 법 준수와 위반을 감독하고 시정하는 게 행정부 역할을 수행하는 집행위원회의 업무이다. 하지만 집행위원회는 이를 꺼려왔다. 위 3개 회원국뿐만이 아니라 다른 회원국에서도 이런 밀어내기는 종종 암묵적으로 자행됐다. 2015년 100만 명이 넘는 난민 신청자가 쇄도한 후 당시 EU 회원국들은 난민 의무할당제를 두고 격렬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이후 난민 신청자 입국 저지에 회원국들은 몰두했다.

어쨌든 EU 내 난민 신청자는 지난해와 올해 채 10만 명도 되지 않는다.(도표) 난민을 통제해야 한다는 현실과 인권 선진국으로서의 규범 준수가 충돌해 왔지만 EU에서는 몇 년간 현실이 우선했다. 규범적 권력이라는 구호가 다소 공허하게 들린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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