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게 어쩌다가 왜 끔찍한 변신이 일어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이유의 생략은 변신이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임의성을 부여해 준다. 우리의 삶을 순식간에 송두리째 바꿔 놓고 기존의 삶에서 우리를 단절시키는 일시적이거나 혹은 영구적인 사건이 어느 날 문득 일어나는 것처럼. 그저 일상을 살았을 뿐인데 코로나19 감염으로 모든 일상이 단절되는 일, 일자리를 잃거나 한때 잘 되던 사업이 문 닫게 되는 상황, 신용불량 통지를 받게 되고, 불의의 산재나 교통사고를 당하는 일, 뜻밖에 암과 치매를 선고받는 일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벌레가 되기 전, 그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열심히 돈을 벌어 기꺼이 돈을 내놓았다. 그가 처음으로 탁자 위에 돈을 올려 놓았을 때 가족 모두 얼마나 기뻐했었는지. 그러나 이내 익숙해져 갔다. 식구들은 고마워하면서도 그때만큼 행복해하지는 않았고 당연한 듯 돈을 받았다. 그 안에 따스한 마음이 특별히 오간 적은 없었다. 익숙해지고 당연해진 우리 대부분의 가족처럼.
가족들은 흉측한 벌레가 된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막고, 최소한의 먹을 것을 가져다줄 뿐이다. 그의 마음은 자신에 대한 염려보다 가족에 대한 염려로 가득했지만, 어쩌면 기우였다. 그에게 생계를 의지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가족들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은행안내원으로, 어머니는 바느질일로, 여동생은 상점판매원으로 일을 시작하고, 방을 비워 하숙인을 들인다. 그럴수록 그는 가족에게 짐스럽고 버거운 존재가 된다. 생계를 담당했던 그의 역할 부재는 그렇게 대체되어 메워져 가고, 아이러니하게 인간으로 남은 가족이 새로운 삶의 방식과 소통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흉측한 벌레로의 변신이라는 설정은 우리로 하여금 가족의 입장에도 온전히 공감할 수 있게 해준다. 한때 내 아들, 내 오빠였지만 이제는 점차 정말 벌레 이상으로는 대할 수 없는 그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사고와 내면은 여전히 온전한 인간이었다. 어느 날 거대한 벌레로 살아 가야 하는 그의 편의를 위해 가족이 방안의 가구를 모두 치워버린다. 벌레로서는 텅 빈 방안에서 자유롭게 기어다닐 수 있겠지만, 그는 인간으로서의 삶의 흔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끼던 벽에 걸린 그림만큼은 떼내지 못하도록 벽에 매달리고, 가족들의 저지에도 기회만 되면 방 밖으로 나가려는 그의 시도는 스스로 인간의 정체성을 놓지 않으려는 처절한 노력이었다.
카프카의 ‘변신’이 출간된 것은 1916년, 무려 한 세기 전이지만 삶과 관계에 대한 울림은 지금 이 시점에서도 변함없이 생생하다. 어느 날 벌레가 된 그레고리 잠자와 그 가족의 이야기에서 현실로 돌아와 본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현실에서는 누구도 거대하고 흉측한 벌레로 변신하는 일은 없다는 것 말이다. 내가 숨 멎는 날까지 인간으로 살아 갈 수 있고, 다른 이와 벌레 아닌 인간으로 마주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거기에서 안도하기는 이르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난, 사고, 불운, 질병, 노화와 죽음이 가져올 변신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는 여전히 남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어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다른 이가 인간답게 처우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서로 도와야 할까. 감당 못 할 큰 문제에 부딪혀 혼자 힘겹게 고군분투하다가 쓰러지게 방치하지 않고 어떻게 함께 보살피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결국 복지국가는 인간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되고, 모든 인간이 삶의 전 과정을 인간답게 사는 것을 지향하는 노력이다. 우리가 사회적 존재로서 각 개인의 복지를 위해서도 상호의존적이며 소통해야 하는 존재임을 아는 것, 누구는 빼고 우리끼리 잘 살자는 집단적 이기심을 넘어서는 것이다. 전율, 불안, 소외, 좌절과 같은 ‘카프카적’(Kafcaesk) 상태로부터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안전망과 협력의 구조를 짜기 위해 연대하는 것이 복지국가다. 변신과도 같이 우리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