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공공기관 인턴, 높은 경쟁 뚫어도…
일 없이 공부만 하는 '독서실 인턴' 비일비재
지난해 하반기 빅3 공공기관 한 곳에서 3개월 체험형 인턴으로 일한 A 씨는 "인턴 기간 내내 자격증 공부만 했다"고 회상했다. 배정받은 업무도 자리도 없었고, 노조 사무실이나 회의실 같은 빈 곳에 의자만 가져다 놓고 앉아 있었다. 명목상 부서 배치는 있었지만, 부서 관련 일은 거의 받지 못했다.
A 씨는 입사 후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회사에서 필요 없는 인력인데, 정부 방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뽑았다는 설명을 들었다. 할 일이 없으니 출근하면 취업을 위한 자격증 공부를 했다. 그는 "돈도 받고 자격증 공부도 하고 이력서에 한 줄 적어 좋았지만, 솔직히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취업 시장이 점점 치열해지며 안정적인 공기업과 공공기관의 인기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3개월 단기 인턴 자리도 수십 대의 경쟁률을 뚫어야 할 정도다. 그러나 힘들게 입사해도 실제 업무 경험은커녕 가만히 앉아 자기 공부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공기업 준비생들 사이에서 ‘독서실 인턴’이라는 말이 돌 정도다.
사실 공공기관의 독서실 인턴이 새롭게 등장한 현상은 아니다. 그동안 3개월 단기로 진행되는 공기업 체험형 인턴은 '무늬만 인턴'이라는 지적이 끝이지 않았다. 쓰고 버린다 해서 '티슈 인턴'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2년 전, 모 공기업에서 3달간 사무보조 인턴으로 일했던 B 씨가 업무 시간 동안 한 일은 대기업 '인적성' 시험공부였다. 함께 인턴을 했던 동기는 CPA 시험을 공부했다. 그는 당시를 두고 "완전 독서실 인턴이었다"고 설명했다.
실제 공기업 인턴에 지원하는 취업준비생들도 뛰어난 업무 경험과 성장을 기대하며 지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독서실 인턴이 더 좋다거나, 바쁜 인턴 업무에 치이느니 NCS 공부하거나 자격증 공부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경우도 많았다.
올해 하반기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의 3개월 체험형 인턴 채용에 지원한 C 씨는 "사실 인턴으로 뭘 대단한 경험을 얻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도 가산점을 얻을 수 있고, 공백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 지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C 씨가 무사히 원하는 인턴 자리를 손에 넣으려면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한다. 인국공은 취업준비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공기업으로, 체험형 인턴도 경쟁이 치열하다. C 씨가 지원한 일반 사무직 인턴의 경쟁률은 32.85:1이다. 이전까지 서류와 면접으로만 인턴을 선발했으나, 이번 채용에서는 NCS 필기시험이 추가됐다.
C 씨는 인턴 서류 전형을 통과해 지난 7일 NCS 필기시험을 치렀다. 그는 "문제도 어렵고 시험 시간도 부족했다"며 "경쟁이 치열한데 과연 그 안에 들 수 있을까"며 한숨을 쉬었다. 만약 필기를 통과해도 실제 정규직 공채를 위한 가산점을 따기는 쉽지 않다. 근무 중 우수 평가를 받은 인턴에게만 가산점이 주어지는 데다가 인턴 가산점도 공채에서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물론 모든 공기업과 공공기관 인턴의 업무 강도가 현저히 낮은 건 아니다. 기업·부서마다 천차만별이다. 올해 3개월간 공공기관에서 인턴으로 일한 D 씨는 "기관에서도 문제를 인식해 나름대로 인턴에게 업무 참여를 시켜주려고 했으나 부서마다 차이가 있었다"고 말했다.
바쁘게 일하며 실제 업무 경험을 쌓는 인턴도 있다. 서울 소재 공공기관에서 1년간 인턴십을 했던 E 씨는 같은 기관에서 두 부서를 돌며 각기 다른 업무 강도를 겪었다. 첫 부서에서는 여유롭게 개인 공부할 시간이 있었지만, 두 번째 부서에서는 실무를 경험하며 바쁘게 일했다.
E 씨는 "(바쁜) 두 번째 팀에서의 근무가 첫 번째 팀의 인턴 근무 때보다 월등히 좋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확실히 자기소개서에서 쓸 수 있는 경험은 두 번째 팀에서 많이 얻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 팀에서 책임감도 더 많이 느꼈다"고 덧붙였다.
인턴십의 질은 천차만별로 다르지만, 마땅한 개선 방안은 요원하다. 이런 가운데 체험형 인턴 자리는 점점 늘고 있고, 양질의 정규직 일자리는 줄고 있다. 공기업·공공기관 경영정보 시스템(알리오)에 따르면 올해 한국철도공사, 한국전력공사, 한국수력원자력 등 36개 공기업이 채용하는 체험형 인턴은 지난 4월 기준 지난해보다 4.5% 늘었다. 반면 이들 기업의 상반기 정규직 채용은 지난해 대비 39.1%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