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임명직들이 아니면 수행할 수 없는 전문적인 영역에서 효율적으로 일하라는 의미에서 권력을 부여한다. 따라서 경제정책 같이 ‘임명된 사람들이 더 나은(항상 그렇지만은 않지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분야까지 선출된 권력의 우위를 내세우며 뜻대로 하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선출직을 선출하기 위한 제도, 그리고 선출직들이 의사를 결정하는 제도는 절대적인가 하는 의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제도의 근간은 다수결이다. 다수결도 여러 형태가 있지만 가장 많이 활용되고 익숙한 것은 이른바 ‘종다수’라고 하는 것이다. 즉, 한 표라도 많으면 그 제안이 채택된다거나 그 후보자가 선출되는 방식이다.
그런데 왜 다수결인가? 너무나도 답이 뻔한 듯한 이 질문에 막상 답하려다 보면 어려움을 느낀다. 그냥 다수가 원하니까? 그렇다면 51대 49로 귀결된 표결에서 49의 의견은 무시해도 되는가? 그뿐 아니라 단순 다수결은 대안이 셋 이상일 때 선호의 순환에 의해 가장 다수가 원하는 것이 오히려 채택되지 않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즉, 다수결이 다수의 선호를 반영하지 못하는 결과도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만장일치로 의사결정을 하면 어떨까?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시대의 화백은 ‘전수결’, 즉 만장일치로 의사결정을 했다고 전해지며 교황 선출을 하는 콩클라베에서도 그렇게 한다. 다만 모든 표결에 이를 적용하면 합의점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더라도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 단점이다.
경제학의 ‘사회선택(Social Choice)’이라 부르는 분야(정치학이나 정책학에도 유사한 분야를 연구)는 이런 부문을 연구하는데, 아마 그 기원은 프랑스 대혁명 직전 쟝 샤를 보르다가 발표한 논문일 것이다. 그에 의해 제안된 것을 보르다 투표법이라 하는데, 이 방법은 일종의 점수제로서 개인의 선호 강도를 반영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투표 대상인 대안(또는 후보)이 셋 있을 때 가장 선호하는 대안에 3점, 다음 대안에 2점, 마지막 대안에 1점을 주고 그렇게 집계된 대안 중 최대 점수를 받은 대안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슬로베니아 공화국에서는 소수민족인 헝가리계와 이탈리아계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을 선출할 때 이 방식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러면 이 방식은 완벽한가? 그렇지 않다. 이 방식에서는 사전에 부여하는 가중치에 따라 또다시 선호 체계가 바뀌는 문제가 발생한다. 결론적으로 모든 원칙을 만족하는 투표 방식은 없다. 따라서 어느 방식을 택하든 그것의 단점을 보완하는 여러 조치를 병행하는 수밖에 없다.
미국의 배심원 평결은 전수결을 원칙으로 하며 정해진 시간 내에 합의된 평결을 도출하지 못하면 배심원을 전원 교체하여 새로이 절차를 시작한다. 따라서 평결에 도달하기 위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치열한 토론을 하여 전원 합의에 도달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가 국회에서 하는 입법활동도 이와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제출되는 법안에 각 당이 이론이 별로 없는 경우도 있지만 이른바 쟁점법안이라 하여 당별 입장이 크게 다른 경우가 있다. 이때 원내 지도부 간의 협상을 통해 서로 간의 의견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을 많이 한다. 이 과정 중에 각 당의 양보 등을 통해 법안 내용이 어느 정도 수정이 된다. 이렇게 해서 단순한 다수결 제도를 따르더라도 실제로는 모두가 합의하는 방향으로 정리를 해나가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은 흔한 말로 협치라고 불리기도 한다. 즉, 무슨 안이든지 다수의 뜻대로 정하고 소수는 무조건 승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 힘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와 같은 협치의 정신을 살리고자 했던 노력이 있었는데 요즈음 그렇지가 않은 듯하다. 협치는 겸양의 미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다수결이라는 제도의 미비점을 보완하려는 제도적 장치이며 민주주의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