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 사회의 발달은 늘 경제, 기술의 발달보다 더디다. 노동시장이 특히 그렇다. 한국은 ‘세계 10위 경제대국’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노동 관련 제도, 관행은 후진적이다.
경제가 발전해도 한국 노동시장엔 ‘갈등’만 더 심화하는 상황이다. 저성장 고착화로 기업들은 노동비용 증가에 신음하지만, 노동단체는 호봉제로 대표되는 연공서열형 임금 체계를 고수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에 연금 지급개시연령은 65세(1969년 이후 출생자)로 미뤄졌지만, 정년은 지금도 60세다.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에는 간접고용이, 4차 산업혁명과 맞물려 플랫폼노동이 급증했다. 반면,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은 1953년 체제에 머물러 있다. 상당수 ‘실질적 노동자’가 법적 ‘근로자’로서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최저임금 심의에선 타협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산업이나 노동환경이 급변하면서 현실을 제도가 못 따라가는 제도적 지체가 발생하는 건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며 “한국의 문제는 제도적 지체보단 제도적 지체에 대응해온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고용구조 다양화로 노동법 사각지대가 늘어나고, 이익 분배에서 배제된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노사갈등 격화로 갈등비용이 늘고 있지만, 한국 노동법은 임금·고용 관계를 기준으로 한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수십 년간 땜질만 하고 있다”며 “이제는 노동 관련 제도·관행을 포괄적으로 논의해 리세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최근 노동시장 최대 이슈는 정년 연장과 상병수당 도입이다.
정년 연장은 임금체계 개편, 연금제도 개편, 청년고용 확대 등 수많은 사회 문제와 맞물려 있다. 국내 3개 완성차 노동조합은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늘리는 방향의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을 요구하는 국민동의청원에 나섰고, MZ세대(밀레니얼세대와 Z세대의 합성어) 노동자들은 이를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추진하고 있다.
정년 연장은 연금 지급연령 조정에 따른 소득 공백 차원에서 필요하지만, 호봉제가 지배적 임금 체계인 상황에서 노동비용 증가와 신규 채용 축소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상병수당 도입도 간단치 않다. 정부는 4월 ‘상병수당 제도기획자문회원회’ 회의를 시작으로 상병수당 도입 논의를 본격화했으나, 보장대상·수준·기간·재원 등을 놓고 노사 간 견해차가 크다.
이 교수는 노사 모두에 ‘교환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 상황은 친노동이냐, 친기업이냐보다는 ‘몸집이 커졌으니 몸에 맞는 새 옷을 마련한다’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노사 모두 이익을 고수하기보단 합리적인 수준에서 양보할 것은 양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