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건국한 지 불과 10여 년 만에 전국적으로 분열과 반란이 계속되면서 나라가 무너지고 강남 지역으로 쫓겨나면서 동진(東晋)으로 다시 재건하였다.(동진의 재건에 따라 이전의 진은 西晋이라 칭해진다) 그런데 이 진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무능했던 왕조로 평가되며, 사실상 진나라가 남긴 업적은 거의 손에 꼽을 게 없을 정도이다.
中 역사상 가장 무능했던 晋 왕조
그 무능했던 진나라에서도 특히 혜제(惠帝)는 역대 중국 황제 중 가장 무능한 혼군(昏君)으로 손꼽힌다. 그는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고 굶주려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라는 말을 듣자 “왜 고기로 쑨 죽을 먹지 않는가?”라는 ‘명언’을 남겼다. 또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는 “저 개구리들은 관(官)을 위하여 우는 것이냐, 아니면 백성을 위해 우는 것이냐?”라는 우둔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옆의 신하는 “예. 관에서 우는 개구리는 관을 위해 울고, 민(民)에서 우는 것은 민을 위해 웁니다”라는 우문우답의 극치를 보여 주었다.
우둔한 황제 혜제의 황후였던 가남풍(賈南風)은 중국 역사상 측천무후에 비견될 만큼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딸만 셋 있었고 아들이 없었는데 다른 후궁에서 낳은 황태자를 끝내 암살하였고 대신(大臣)을 비롯하여 많은 정적들을 잔혹하게 죽였다. 다른 후궁들이 임신하면 창으로 복부를 마구 구타하여 유산시켰으며, 또한 음란하여 몰래 자기 침실에 들인 미소년들을 비밀이 탄로되지 않도록 수없이 죽이곤 하였다.
가황후에 아부해 권세와 부 거머쥐어
그런데 이러한 절대권력 가황후(賈皇后)에게 아부하여 권세를 얻고 부를 거머쥔 인물이 있었다. 바로 석숭(石崇 ; 249~300)이었다.
석숭은 서진의 개국공신 석순(石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가황후의 외조카 가밀(賈謐)에게 아부하여 온 나라에서 최고의 권세와 엄청난 부를 누렸다. 일찍이 석숭이 형주자사로 재직할 때 남만교위(南蠻校尉)와 응양장군(鷹揚將軍)을 겸직하면서 멀리서 오는 상인들을 강탈하여 엄청난 재산을 긁어모았다.
마치 아방궁과도 같았던 석숭의 저택은 화려하게 장식된 방들이 수없이 이어졌다. 뒤쪽의 방들에는 아름다운 자수로 꾸민 비단옷을 입고 온몸에 진주와 보석으로 치장한 수백 명의 첩들이 살았다. 천하의 모든 악기로 내는 아름다운 음악소리는 모두 그의 귀에 들려졌고, 지상에서 나는 모든 진귀한 산해진미들이 그의 주방으로 들어갔다.
석숭과 왕개의 볼만했던 사치 경쟁
석숭과 진무제(晋武帝)의 장인인 왕개(王愷) 간에 벌어진 사치 경쟁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왕개가 식사를 마친 뒤 설탕물로 그릇을 닦자 석숭은 양초로 불을 땠다. 왕개가 40리에 달하는 보랏빛 포(布)를 자리에 깔자 석숭은 50리에 이르는 면(綿)을 깔았다.
언젠가는 진 무제가 몰래 왕개를 도와 두 척(尺)이나 되는 산호수를 하사했는데, 가지가 무성하고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모양이 장관을 이루었다. 왕개가 짐짓 산호수를 석숭에게 가져가 보여주자 석숭은 구경을 마친 뒤 별안간 철로 만든 공을 슬쩍 던져 산호수를 깨뜨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왕개는 너무 놀라서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석숭은 너무나 태연하게 하인을 부르더니 집안에 있는 산호수를 모두 가져오도록 하였다. 왕개가 눈을 들어 살펴보니 높이가 3척, 4척 되는 산호수도 많았고 그 모양들도 휘황찬란했다. 왕개가 가져온 산호수 정도의 것들은 많고도 많았다. 왕개는 아예 할 말을 잊었다.
애첩 녹주…“너를 위해 화를 입는구나”
그 뒤 조왕(趙王) 사마윤(司馬允)이 정변을 일으켜서 가황후를 제거하고 가밀도 죽였다. 석숭은 가밀과 가깝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 무렵 석숭에게는 녹주(綠珠)라는 애첩이 있었다. 그런데 사마윤의 참모였던 손수(孫秀)가 녹주를 탐내 그녀를 손에 넣고자 부하를 보내어 데려오도록 하였다. 손수의 부하가 집에 당도하자 석숭은 수십 명의 첩들을 나오게 하였다. 모두 아름다운 패옥으로 치장한 미녀들이었다. 석숭이 “이 중에서 마음에 들면 얼마든 데려가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하는 “여러 명 필요 없고 오직 녹주 한 명만 필요하오”라고 대답하였다.
석숭은 “녹주는 내가 아끼는 애첩이다. 너희들은 갖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칼에 거절하였다. 그 부하가 “아무쪼록 학식이 높으신 어른께서 재삼재사 다시 신중하게 판단해 보십시오”라고 권하였다. 하지만 석숭은 끝내 듣지 않았다. 부하가 돌아가 보고하자 손수는 사마윤에게 석숭을 죽이라고 권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석숭은 자신이 먼저 손을 써서 반란을 일으켜 사마윤과 손수를 처치하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손수가 이를 알아채고 황제의 명을 받아 사신을 파견하여 석숭을 체포하려 하였다. 이때 석숭은 누각에서 잔치를 벌이고 있었는데, 사신을 보자 녹주에게 “오늘 너를 위하여 나는 화를 입는구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녹주는 “당신 앞에서 죽음으로써 당신에게 보답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누각에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형제·처첩·자식까지 모두 참수
석숭은 붙잡혀 가면서도 사태 파악을 하지 못했다. 그는 자기를 잡아가는 자들에게 “내가 멀리 유배되는 것밖에 없으리라!”라고 소리쳤다. 그를 실은 수레가 사형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석숭은 “이 어리석은 자들이 내 재산을 노리는구나!”라고 크게 탄식하였다.
그를 붙잡아온 자가 “당신의 재산이 당신을 해치는 걸 알면서 왜 진작 그것들을 나눠주지 않았소?”라고 힐난하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석숭의 어머니를 비롯해 형제와 처첩, 자식 등 모두 50명이 모조리 참수당했다. 석숭의 나이 불과 쉰두 살이었다. 산더미와 같이 많고도 많았던 그의 엄청난 재산 역시 모조리 몰수되었다. 그의 집 안에는 물방앗간만 해도 30여 곳이나 되었고, 노비들은 800명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