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을 잘 쏘던데”,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삶에 미련이라고는 없는, 처연한 눈빛으로 담담하게 말한다. 누아르 영화 특성상 남성에 가려지기 마련인 여성 캐릭터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자신만의 톤으로 넷플릭스 영화 ‘낙원의 밤’을 이끌어가며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배우 전여빈의 이야기다.
‘낙원의 밤’ 공개 후 전여빈은 ‘대세’로 떠올랐다. 정작 전여빈은 현재 인기를 체감할 새도 없다. tvN 드라마 ‘빈센조’ 촬영으로 인해 지방을 오가며 강행군 중이기 때문이다.
23일 오후 화상으로 만난 전여빈은 “촬영장만 다니고 있어서 인기를 실감하지 못한다”면서도 “친구들이나 친구들의 부모님이 ‘재미있게 보고 있다’고 전해주면서 ‘많은 분들이 작품을 봐주시고 계시는 구나’ 감사함을 느끼고 있다”며 웃어 보였다.
9일 넷플릭에서 공개된 영화 ‘낙원의 밤’은 조직의 타깃이 된 한 남자 태구(엄태구)와 삶의 끝에 서 있는 한 여자 재연(전여빈)의 이야기를 그렸다. ‘신세계’(2013) ‘마녀’(2018)의 박훈정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누아르 장르의 영화로 공개 전부터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영화는 일상을 벗어나 잠시 쉬어가는 곳인 제주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색칠해나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아름다운 제주가 누군가에게는 벼랑 끝에 선 기분이 들게 마저 한다. 전여빈은 영화에서 이 아이러니함을 눈빛, 목소리, 시선만으로도 섬세하게 표현해내며 독특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전여빈은 어렸을 적부터 홍콩영화에 대한 환상이 컸단다. 특히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보며 배우를 꿈꿔온 그는 ‘낙원의 밤’ 시나리오를 접한 뒤 어릴 적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옛날 홍콩 영화들을 좋아했어요. 홍콩 누아르 영화 안에서 주인공들은 악인들에 총을 쏘며 동료들과 전우애를 나누잖아요. ‘나도 그런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지 않을까?’란 막연한 꿈을 꿨죠. 그리고 배우가 되고 나서 좀 더 직접적으로 그 꿈을 꾸게 됐어요. ‘낙원의 밤’ 시나리오를 받고 그런 꿈을 실현할 수 있게 돼 작품을 선택하게 된 거죠.”
전여빈이 맡은 재연은 시한부 삶을 선고받아 어떤 상황에서도 초연하지만,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누아르에서 보기 드문 여성 캐릭터를 그려내 영화에 다채로운 매력을 더했다. 영화의 마지막 10분은 전여빈의, 전여빈에 의한, 전여빈을 위한 장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낙원의 밤’은 정통 누아르와 결을 함께 하지만 특히 내가 연기한 재연은 영화 속에서 변곡점이 돼요. 이런 캐릭터를 맡게 돼 아주 기쁘게 생각해요. 통상적으로 봐왔던 정통적 누아르 속 단순 여주인공이었다면 안 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낙원의 밤’ 속 여주인공 캐릭터는 달라요. 그래서 꼭 하고 싶었죠. 우리 영화의 마지막 10분이 ‘낙원의 밤’을 선택한 큰 계기가 됐을 정도니까요.”
극 중 제주도에서 무기상을 하는 삼촌과 함께 사는 재연은 노련한 사격 액션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가녀린 체구를 지닌 그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담담하게 총을 쏘아댄다. 그는 규격화된 사격액션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고.
“박훈정 감독은 내가 완벽한 무술을 배우길 원치 않으셨어요. 기본적인 자세 정도만 배우길 원하셨죠. 완벽하게 칼 각을 보이는 캐릭터는 아니었거든요. 삼촌(이기영)에게 총을 배워 자기만의 총을 쏘는 캐릭터였어요. 실제 사격장에서 연습을 했는데, 총을 쏠 때 생기는 반동과 큰 사격 소리에 많이 놀랐어요. 팔, 다리가 떨릴 정도로요. 평소 운동 신경이 꽤 좋은 편이라 연습한 만큼 많이 늘었어요.”
전여빈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엄태구와의 ‘케미스트리’도 영화의 관전 포인트다. 극 중 두 사람은 제주도에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서로에 대한 연민이 발전해 목숨까지 거는 사이가 된다. 연민, 동질감, 사랑 사이를 오가며 묘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이다.
“시한부인 재연은 더 이상 자신의 인생에 그 누구도 필요없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애증하던 삼촌이 떠나면서, 자신에게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걸 느꼈을 것 같아요. 그러다 마침 곁에 있었던 태구를 자기와 함께 해줄 친구나 동료로서 필요하다고 느꼈을 거라 생각해요. 아마 동병상련 또는 서로를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연애의 감정은 아니지만,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사랑이 아니었을까요?”
전여빈은 엄태구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배우로서 마음가짐, 태도 등 배울점이 많았다며 고마움을 드러냈다.
“실제로 성향이 전혀 달라요. 제가 외향적이라면 엄태구 배우는 내향적이에요. 이처럼 겉보기에는 많이 다를 수 있지만, 연기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나 현장을 대하는 진지한 마음은 많이 닮았어요. 배우이자 한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케미스트리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2015년 영화 ‘간신’으로 데뷔한 전여빈은 ‘밀정’, ‘죄 많은 소녀’,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해치지않아’, 드라마 ‘구해줘’, ‘라이브’, ‘멜로가 체질’, ‘빈센조’까지 스크린과 안방을 오가며 배우로서 이름을 각인시켰다. 특히 매 작품마다 강렬한 캐릭터에 도전하며 각각의 아름다움을 끄집어냈다는 평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은 각각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봤을 때 예쁘지 않을 수 있지만 내가 봤을 때 각각의 캐릭터가 아름다움이 느껴졌거든요. 앞으로도 또 다른 결을 가진 예쁜, 아름다운 캐릭터를 만나고 싶어요. 배우를 선택하고 배우 생활을 하면서 내 마음 속에 항상 있는 것은 내가 어떤 시도를 하고 또 완벽한 타인이 됐을 때 주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게 내 소망이에요.”
대세 행보를 시작한 전여빈에게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일까. 그간 전형성을 벗어난 여성 캐릭터를 많이 해온 그는 ‘여배우’라는 정체성보다 ‘배우’라는 존재로 평가받길 바랐다.
“앞으로 성별을 뛰어 넘는 멋진 연기를 하고 싶어요. ‘멋지다’는 말이 상투적일 수 있으나, 작품 안에서 제게 주어진 역할이 잘 발휘됐으면 해요. 배우로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감사해요. 한 작품 끝났다고 배우의 인생도 끝난 게 아니니, 살아 있는 한 좋은 배우로 쭉 가고 싶어요. 매 순간, 매 작품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목표를 두고, 그 안에서 부끄럽지 않은 연기를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