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들은 힘없는 동물을 상대로 학대를 자행하는가? 2019년 7월 13일,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아침이다. 서울 연남동 경의선숲길에서 한 사내가 물체를 바닥에 내리쳤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에 걸쳐 패대기친 그 ‘물체’는 놀랍게도 산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로 즉사했다. 세제를 섞은 사료와 물을 고양이가 먹으면, 죽는지 안 죽는지 보려고 했고, 고양이에게 학대를 한 끝에 죽음에 이르게 한 이 사내는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는데, “몇 년 전 취업 사기로 명의 도용을 당해 소송을 당하고, 현재까지 취업도 못하고 신용불량자로 살아가는 신세가 됐다. 이 때문에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가 길고양이를 화풀이 해소 대상으로 삼았다”고 진술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동물 학대에 대한 쩨쩨하고 비겁한 변명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 주변에는 개나 고양이를 학대하는 사람보다 가족처럼 사랑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우리는 왜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사랑하는가? 시골에서 개를 여럿 키웠다. 삽살개와 진돗개, 혼혈종 개들과 더불어 사는 동안 그들의 천부적인 다정함과 상냥함, 날쌤과 영리함에 매혹되었다. 개들은 숱한 걱정거리와 문제를 안고 고적한 생활을 하는 내가 꿋꿋하게 버티도록 기꺼이 도움을 준 충직한 벗이었다. 잠시 집을 비우고 나갔다 돌아오면 개들은 반가움을 이기지 못 한 채 꼬리를 격렬하게 흔들며 우리의 품으로 펄쩍 뛰어들고 제 온몸을 문지르며 기쁨을 표시한다. 그 순진하고 격렬한 환대에 감동을 받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다. 개들은 저와 함께 사는 이들에게 아낌없이 제 사랑을 퍼붓고 변함없이 환대한다. 개들의 신뢰는 어떤가? 우리 발치에 납작 엎드려 가슴에서 심장이 맥동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윽고 숨을 고요하게 색색거리며 잠든 개를 보면 알 수가 있다. 그토록 평화스럽고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신뢰의 증거다. 개들은 우리와 떨어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단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우리를 전적으로 믿고 제 운명을 의탁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개들이 야생성을 품고 있는 점이다. 개들은 인류가 동굴에서 살던 수렵시대부터 사람과 함께 사냥에 나섰다. 개들은 온순하게 길들여져 인간과 먹고 자며 살았다. 개들은 길들여진지 수천 년이 지났건만 그 내면 깊숙한 곳 어딘가에는 야생성이 살아 있다. 개들은 코를 땅바닥에 대고 킁킁 거리며 온갖 것들의 냄새를 맡는다. 그들은 뛰어난 후각 능력을 통해 작은 밭쥐나 새 같은 동물이 남긴 흔적을 찾아 쫓는다. 개들은 목줄에 묶인 채 지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목줄에 묶인 동안 개들은 눈에 띄게 시무룩하다. 하지만 들판이나 바닷가 백사장에 목줄에서 풀려난 개들은 미친 듯이 즐거워하며 뛰어다닌다. 개들은 질주하고, 또 질주하며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만끽한다. 들판과 자유를 좋아하는 그들이 천부적인 사냥꾼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개의 무의식에 은닉된 야생성이 돌연 튀어나올 때 이미 문명생활 속에서 야생성을 잃어버린 우리 안에 희미하게 남은 본성도 깨어난다.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난 메리 올리버(1935~2019)는 평생 스물여섯 권의 시집을 펴낸 시인이다. 올리버는 개를 사랑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시인의 예리한 안목으로 개들을 관찰한 뒤 이렇게 썼다. “개는 그 풍요롭고 여전히 마법과도 같은 첫 세계의 전령들 중 하나다. 개는 우리에게 우아한 운동 능력을 지닌 육체의 쾌감, 감각의 날카로움과 희열, 숲과 바다와 비와 우리 자신의 숨결의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깡충거리며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그들 중에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는 개는 없다.” 그가 개를 사랑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은 시집 ‘개를 위한 노래’를 남긴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 시집은 “개의 윤기 흐르는 곱슬거리는 털, 정직한 눈, 아름다운 짖음”을 예찬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냄새의 거칠고 높은 음악”을 듣는 경이로운 존재에게 바친 송가로 이루어졌다. 개는 “가볍게 짖어 세상을 흔”드는 “학교에 다닌 적 없는 작은 야생의 존재”다. 개들은 매우 위험한 송곳니를 가졌지만 보통은 “진실하고 사랑스러운 친구”이고, 뜻밖에도 “쾌락주의자”이기도 하다. 개들의 기분은 변화무쌍하다. 어느 때는 충직하고, 어느 때는 장난꾸러기이며, 어느 때는 사춘기 아이들처럼 반항한다. “내가 앉아, 하면 너는 뛰어오르지./내가 이리와, 하면 넌 모래밭을 내달”린다. 개들이 늘 착하고 고분고분한 것만은 아니다. 가끔은 흥분해서 으르렁거리고, 새로 산 소파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긁어 흠집을 남기며, 멀쩡한 화분을 넘어뜨려 깨트리고, 우리가 방치한 책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개들은 짧은 생애 동안 우리 곁에 머물고 떠난다. 우리 품에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성과, 유일성, 가시성의 세계”에서 사라진다. 개들이 떠날 때 우리는 이별과 죽음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배운다.
개들은 우리와 모든 걸 함께하고 싶어 한다. 우리와 함께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고, 폭설이 내려 하얗게 변한 과수원에서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논다. 짖고, 달리고, 장난을 좋아하는 개들은 살아 있음의 기쁨과 경이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존재들이다. 개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다정한가? 올리버는 ‘개들의 다정함’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어때, 퍼시? 모래밭에 앉아/달 뜨는 거 구경할 생각인데./보름달이 뜰 거야./그렇게 우리는 달 구경을 나서지//달이 떠오르고, 난 그 아름다움에/전율하며 시간과 공간에 대해/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천국을/생각하는 미미한 존재. 그렇게 우리는 앉아서, 나는//달의 완벽한 아름다움이 얼마나 감사한지,/그리고, 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생각하고, 한편 퍼시는//나에게 기대어 내 얼굴을/올려다 봐. 내가 완벽한 달처럼/경이롭다는 듯.”(올리버, ‘개의 다정함’) 퍼시는 시인이 사랑하던 개다. 개와 그 주인은 모래밭에서 나란히 앉아 달이 뜨는 걸 구경한다. 인간이 공중에 뜬 달의 완벽한 아름다움에 경탄하듯이 퍼시는 주인의 얼굴을 완벽한 달을 보듯 감탄하며 올려다보는 것이다.
개들은 먼 곳에서 우리에게 온다. 개들이 구름을 타고 온 것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왔는지를 자주 망각한다. 개들이 어떤 장소를 거쳐서 오는지는 오직 하늘만이 아는 일이다. 개들은 먼 곳에서 와서 우리와 한 집에서 거주하지만 우리의 소유물은 아니다. 개들은 우리에게 우정과 환대를 베풀고, 기쁨과 경이의 존재로 살다가 어느 날 우리 곁에서 사라진다. 개들은 빨리 성체로 자라고 사람보다 훨씬 더 짧은 햇수를 살다가 떠난다. 개들이 우리 곁에 머무는 것은 고작해야 15년 안팎이다. 올리버도 깊은 감정을 나누고 소통하는 이 경이로운 존재가 그렇게 빨리 떠난다는 사실을 슬퍼했다. “개의 질주하는 삶은 몹시도 짧다. 개들은 너무 빨리 죽는다.” 개들이 늙는 것은 우리가 부주의하거나 방치한 탓이 아니다. 개들이 우리와 함께 보내는 생애가 짧은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지금 우리 곁에 머무는 저 작은 개는 우리와 함께 얼마나 많은 여름을 경험할까, 하고 생각하니 돌연 슬픔이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