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한 화학사 마케팅 홍보 관계자와 얘기를 나누던 중 예상치 못한 말이 들렸다. 정유ㆍ화학업계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늘 묻는 레퍼토리, "요새도 별일 없으시죠?"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정유ㆍ화학사들은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제품을 만들지 않는다. 상품을 다른 기업들에 파는, 소위 'B2B' 업체다. 대중적인 관심이 낮을 수밖에 없다. 또, 사업이 원료 수급부터 제품 생산, 판매까지 물 흐르듯 이어지기 때문에 B2B 업계 중에서도 유독 '심심한' 판으로 통해왔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ESG(환경ㆍ사회ㆍ지배구조) 경영이라는 돌풍이 불면서 '환경의 주범'으로 낙인 찍혀있는 이 업체들은 더더욱 조용히 지내게 될 줄로만 알았다.
오판이었다. 오히려 ESG를 전면에 내세우며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환경파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친환경'의 이미지를 쌓는 것이다.
SK종합화학은 최근 폐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열분해유 전문 생산업체 브라이트마크와 손을 잡았다. 양사는 폐플라스틱 열분해ㆍ후처리 기술 노하우를 공유해 열분해 상용화와 설비 투자를 계획 중이다.
GS칼텍스도 매년 아모레퍼시픽에서 나오는 플라스틱 공병 100톤(t)을 친환경 복합수지로 재활용하고 이를 다시 화장품 용기 등에 적용하기로 했다.
에쓰오일(S-OIL) 또한 '최고의 경쟁력과 창의성을 갖춘 친환경 에너지 화학기업'이라는 비전을 앞세우고 2030년까지 수소ㆍ연료전지ㆍ재활용 등 신사업 분야에 진출하고 탄소 배출량을 최소화할 계획이다.
롯데케미칼은 올해를 'ESG 경영의 원년'으로 삼고 앞으로 10년간 5조2000억 원을 투자해 탄소 배출량을 크게 줄이고 친환경 사업을 확대하기로 했다.
이제는 정말 새로운 시대가 왔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라는 말은 더는 그럴듯한 레토릭이 아니라 기업들의 필수 '생존 지침'이 됐다. 정유ㆍ화학 기업들의 이유 있는 변심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