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이전의 한국 경제는 배고픔을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보릿고개라는 말은 가을에 추수한 식량은 동이 나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 끼니를 걱정하던 봄철의 어려운 춘궁기(春窮期)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우리 삶에서 보릿고개라는 단어를 없앤 것 중 중요한 하나는 통일벼라는 새로운 쌀 품종의 도입이었다. 통일벼는 쌀 맛이 전통 품종보다 못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지만, 생산량이 전통 품종보다 월등히 많은 획기적인 신품종이었다. 통일벼의 도입으로 우리 농가의 경제력은 크게 높아졌고, 이를 바탕으로 배고픔을 해소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통일벼를 통한 충분한 식량 공급을 기반으로 제조업 위주의 한국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통일벼의 역사적 역할은 주식 재료로서의 쌀이라는 본래의 의미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고 먹고사는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현재 시점에서 본다면 완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오늘날에 바라보면 통일벼는 우리의 주식인 쌀이라는 식물의 다양성을 줄어들게 하였다. 인류는 지구상에 있는 35만 종의 식물 가운데 극히 일부에서만 식량을 얻고 있다. 더구나 효율성을 중시하다 보니 생산량이 많은 일부 품종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품종의 다양성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통일벼도 이러한 효율 위주의 인류 활동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일시적으로는 생산성이 높아졌지만, 품종의 다양성을 줄임으로써 지속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우리의 미래에 부담을 안겨준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유전자 변형 물질의 활용도 마찬가지의 사례이다. 인류의 먹거리가 소수의 품종에 의존할수록 만약의 환란에 대한 대응 능력은 약해진다. 지금의 풍요를 누리기에는 높은 생산성이 필요하지만,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서는 다양한 품종의 보존 유지가 불가피하다.
기후변화로 인한 위협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지구의 온도를 높이는 악역을 하는 온실가스를 줄여야 한다고 외치면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을 보고 개탄하며 화를 내곤 한다. 그러나 차분히 돌아보면 기후변화의 원흉인 온실가스는 인간이 편리함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뿐이다.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석탄과 석유라는 화석 연료를 기반으로 근대 문명이 만들어졌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한 화석 연료를 어떻게 질서 있게 줄여나갈 것인지에 대한 실용적인 숙려가 필요하다.
세상에는 미래를 위하여 조용히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활동을 겸손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 중 한 줄기가 바로 스발바르(Svalbard) ‘국제 씨앗 저장고’를 만들어 운영하는 사람들이다. 스발바르는 네덜란드의 탐험가 빌럼 발렌츠가 1596년에 발견한 노르웨이 북쪽 위도 74도에서 81도 사이에 있는 군도이다. 이곳에는 인류의 미래를 위한 보험이라고 불리는 ‘국제 씨앗 저장고’가 있다. 전 세계 유전자은행에서 보내오는 종자들을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언제인가를 위하여 보관하는 곳이다. 씨앗을 보관함으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해 주는 곳이다.
스발바르는 ‘다양성(diversity)’이다. 가능하면 하나라도 더 다양한 작물의 씨앗을 보관하고자 한다. 지금은 비록 주력의 식물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인류에게 필요한 작물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일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미래에 닥칠지도 모르는 재앙과 같은 기아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방패가 될 것이다. 석탄이 주력 에너지원이었던 산업혁명 시기에 당시에는 새로운 에너지원이었던 석유의 개발을 독려하면서 “국가의 에너지 안보는 다양성에 그 해답이 있다”고 역설한 처칠 수상의 논리와 같은 맥락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고 겸손한 자세로 다양한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한다. 아름답지만 춥고 삭막한 극북(極北)의 땅 스발바르에서는 오늘도 누군가가 국제 사회와 협력하면서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