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7일 여성리더들의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이노비즈협회(중소기업기술혁신협회) 산하 여성경제위원회 7대 위원장으로 안복희 네오피에스 대표가 취임한 것이다. 앞으로 3년간 여성 혁신 리더들을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갖게 될 위원장에 오른 안복희 대표는 “이노비즈 여성경제위원회가 여성 기업인들의 활발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성장하는데 앞장서겠다”고 취임 일성을 밝혔다.
안복희 회장은 골프웨어 브랜드 ‘팜스프링스’를 운영하는 네오피에스의 대표다.
고가의 수입 브랜드와 대기업들이 포진한 골프웨어 시장에서 토종 중소기업이 존재감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안 대표는 20년 간 이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다. 단순히 생존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전국에 100여개 매장의 탄탄한 유통망도 갖췄다. 20년간 그가 걸어온 삶은 소의 해인 올해와 닮았다. ‘우보천리’라는 말처럼 느리지만 단단하게 회사를 이끄는데 집중했다. 부진한 점포는 정리하되 가능성 있는 상권에는 새로 매장을 내는 식으로 무리한 확장 대신 늘 100개 내외를 매장 수를 유지해왔다.
◇주부 대신 택한 기업인의 길=그는 타고난 기업인이다. 스물 네 살에 첫 사업으로 정미소를 운영했던 그는 결혼과 출산 후 잠시 기로에 선 적이 있다. 정미소는 이미 정리한 후였다.
“3대째 이어온 가업과 관련된 일을 할지 아내이자 엄마로 살 지 고민이 안됐다면 거짓말일 것”이라는 그는 “기업인 안복희의 삶을 버리기 너무 안타까웠다”라고 회고한다.
1998년 아무도 사업을 시작하지 않을법한 IMF 외환위기 시절 안 대표는 결단을 내렸다. 가업인 봉제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을 전개한 지 1년만에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거래처였던 ‘세마통상’이 이듬해 부도가 난 것이다. 당시 세마통상은 미국 골프웨어 브랜드인 팜스프링스의 한국 판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주부 안복희가 아닌 기업인 안복희라는 점이 그에게 일어설 명분이 됐다.
세마통상의 납품업체로 채권단 중 하나가 된 안 대표는 내친 김에 팜스프링스를 인수했다. 세마통상 인수 후 안 대표는 미국 본사와 담판을 지었다. 당시 팜스프링스라는 상표권이 국내에 등록되지 않은 점을 주목했다. 독자 브랜드로 팜스프링스를 한국에 상표권 등록하고 본사와 별도의 독자적인 회사로 경영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당시 한국 매출이 부진했던 탓이었는지 미국 팜스프링스 본사는 흔쾌히 그의 제안을 허락했다.
이런 그의 담판은 팜스프링스의 경쟁력인 가성비를 확보하는 발판이 됐다. 미국 본사에 지급하는 로열티와 백화점 입점에 따른 수수료를 줄이자 합리적인 가격 책정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사실 골프웨어 제조 원가는 대부분의 브랜드가 비슷하다. 높은 수수료로 인해 가격 거품이 생기면서 소비자는 유사한 소재를 사용한 제품을 고가에 구입해야 했다. 백화점에서 철수한 그는 복합쇼핑몰 등으로 매장을 이전하면서 안정적인 매출 기반도 닦았다.
그는 “‘여성이라 이런 대접을 받는다’며 자신의 능력 부족을 여성 탓으로 치부하는 이들을 자주 봤다"며 "여성이어서 안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든 편견과 차별에 갇혀있는 것이 본질적 문제임을 외면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스스로 편견과 차별에서 벗어나는 것이 껍질을 깨고 사업가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첫 걸음이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안 대표에게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묻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온다.
“지난해 11월에 김장을 수 백 포기 담았어요. 후원하는 시설에서 겨울을 나야 하는데 기부금을 내는 사람이야 흔하지만 직접 김장을 하고 그들의 먹거리를 지원해주는 일은 여성이 남성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죠. 김장을 마쳤는데 허리랑 다리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지만 그 아픔을 잊을 만큼 뿌듯했습니다.”
베푸는 삶은 요즘 그에게 또다른 의미다. 언젠가 은퇴를 한다면 뭘 할지 막막했던 때가 있었지만 이젠 나누는 삶을 살겠다는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사업가인 동시에 어머니이기도 하다. 유학 다녀온 두 아들은 대기업이나 글로벌 기업에서도 탐낼만한 인재였지만 어머니 곁을 고집했다. 안 대표는 두 아들에게 어머니이자 기업 경영을 가르치는 스승인 셈이다.
◇무차입경영·협력사 현금 결제 원칙 고수=안 대표는 무차입 경영으로 20년간 네오피에스를 운영해왔다. 매출이 늘어날 때 더 많은 매출을 올리겠다는 욕심으로 은행에서 자금을 끌어들여 공장을 증설하는 대신 협력사를 먼저 챙기고 내실을 기했다.
안 대표가 고집하는 경영 철칙이 있다. 협력사에 무조건 현금결제를 고집하는 것이다. 어음거래가 난무하던 시절 협력사로 고생했던 기억은 그의 원칙을 더욱 굳건하게 해줬다. 그는 "부도난 어음 때문에 회사가 어려워졌던 경험은 내가 마지막이었으면 한다"고 회고했다.
“영세 협력사일수록 현금이 돌지 않아 고전하는 경우가 많아요. 납품받은 후 1~2개월 내에 전액 현금으로 결제하는 것은 네오피에스를 경영해온 20년간 한번도 어기지 않은 신념입니다.”
그에게 협력사는 협력할 대상이고 함께 성장할 파트너다. 그런 동반자에게 손해를 감수하라고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다.
직원을 대하는 마음도 각별하다. 지난해 패션업계에서는 이름난 디자이너가 네오피에스로 둥지를 옮기면서 한바탕 파란이 일기도 했다. 그 배경에는 네오피에스의 특별한 인센티브가 있다. 디자이너들의 의상이 제품화해 히트상품이 탄생하면 그에 걸맞는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다. 자연히 디자이너들간의 경쟁으로 매년 팜스프링스의 디자인 경쟁력도 높아진다.
“디자이너뿐 아니라 성과를 내는 직원에게 투자하는 일은 기업인이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죠. 그렇게 인재들이 인정받는다면 중소기업도 인재들의 요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회사의 인재경영을 이제 이노비즈협회 여성경제위원회에서 재현할 생각에 벌써부터 설렙니다.”
이순(耳順)을 넘어선 그이지만 새로운 도전은 늘 즐겁다. 사업가 안복희를 선택한 그 순간부터 그에게 도전은 삶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