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담론은 1940년대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제임스 브라이언트 코넌트의 하버드 장학금 정책(중서부 공립학교 학생 중 지적능력 우수자에게 주는)과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미래 가상소설 형태로 1958년에 발표한 ‘능력주의(Meritocracy)’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 소설에서 미래 능력주의 사회는 봉건제 세습을 막고자 개인의 지적능력 시험 성적순으로 공무원, 교수 같은 고급 직업을 갖는다. 성적이 낮은 사람은 보상이 적은 직업에 종사해야만 한다. 시간이 흘러 노동계급 출신 중 성적이 좋아 고급 직업을 갖게 된 사람들은 자신이 속했던 노동계급에 기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이 그렇게 혐오한 세습을 위해 입양 같은 온갖 노력을 다 한다. 결국 능력주의는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로 향해 간다. 특히 소설 마지막은 여성들이 남성 능력주의자들에 대항하는 오늘날의 페미니즘 운동으로 끝맺고 있다.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였던 우리나라 386세대들은 자신들의 신념인 민주주의와 평등을 전 세대에서 실현시키기보다 능력주의 세습에 신경을 더 썼다. 능력주의에서 진보와 보수는 동색이었다. 이들은 늘 자신들이 도덕적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항변한다. 또한 남녀 간에 “군대 한번 갔다 와”와 “애 한번 낳아 봐”로 나누어져 갈등을 빚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소설과 너무 닮아 있다. 그러나 현재 능력주의 논의에는 마이클 영이 ‘능력주의’에서 제시한 한 가지가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적능력 평가로 입사는 물론이고 승진까지 보장받는 구조에서 과연 최초 시험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공정하냐는 문제이다. 이에 기업들은 상당히 진보적 조치를 취하였다. 5년에 한 번 지역 성인교육센터에서 지적능력과 개인의 인성으로 표현되는 노력 정도를 다시 시험 보게 하여 임금을 재산정한 것이다. 오늘날의 근로자 능력개발(competency)이다.
능력주의가 사회 진출과 보상에 대한 거시적인 사회통치 담론이라면, 능력개발은 직장 생존형 미시적 통치 행위이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은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동료와의 경쟁(compete)을 통해 평가받는다. 능력주의는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결판나지만, 능력개발 평가는 일상의 연속이다. 매일매일 직장인의 노력을 측정하고 평가하는 능력개발은 시험 성적에 기반한 능력주의가 놓친, 또 다른 능력자를 선별할 수 있는 장치로 작동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해 보이지 않는다. 능력개발은 능력주의란 거인의 발목 아래에 놓여 있다. 일부 기업에서 능력개발은 저성과자 재교육용으로 소비된다. 나하고 상관없어야만 하는 일로 여긴다. 능력주의가 공정하지 못해 사회를 불평등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기업의 능력개발을 통한 직장인의 재평가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장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업 내 능력개발이 능력주의로부터 독립되어 개인의 능력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이 사회는 마이클 영이 예언한 대로 디스토피아의 사회로 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