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새’는 한 소녀의 보잘것없지만 보편적이며 순간적이었지만 찬란했던 추억과 기억의 저편을 담담하게 그려낸 영화다. 스웨덴 감독 라세 할스트롬의 영화 ‘개 같은 내 인생’을 얼핏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 역시 열두 살 소년 잉마르의 성장기와 그 과정의 아픔을 치유해 내는 영화였다. 다만 ‘벌새’가 이 영화와 다른 점은 굳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시간을 감내하며 흐르기를 기다려낸다. 그런 톤엔 매너(분위기)라면 대만 감독 허우 샤오시엔의 ‘동동의 여름방학’과 오히려 가까워 보인다.
이렇듯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나름의 명작들과 ‘벌새’를 대등하게 비교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이유는 일단 수상 실적으로도 변명이 된다. 해외 유수의 영화제 수상을 포함하여 국내 백상, 대종상 등 총 25개의 상을 받았던 작품이다. 그렇다고 엄청난 시각적 쾌감이 있는 영화는 아니다. ‘벌새’는 충족을 위함이 아니라 그저 멍 때리기 위한 영화이니까.
벌새는 1초에 적게는 19번, 많게는 90번 날갯짓하는 몸집이 자그마한 새다. 1994년은 큰 사건이 많았다. 김일성이 죽었고, 유례없는 폭염이 있었고, 그리고 성수대교가 붕괴했다. 중학교 2학년 은희(박지후)는 이 시절을 ‘수십번 날갯짓’ 하면서 살아낸다. 죽일 듯 싸우다 언제 그랬냐는 듯 화해하는 부모님,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는 수험생 오빠, 겁 없이 남자친구를 방에 데리고 와 재워주는 언니의 ‘비행’ 속에서도 단짝 친구와 남자친구, 자신을 좋아하는 후배가 삶의 소소한 행복들이다.
주인공 은희의 눈에 비친 1994년의 서울과 대한민국 풍경은 지금 보면 낯설기도 혹은 친근하기도 한다. 어느 날 문득 무너져 버린 성수대교를 한강변에서 지켜보면서 자신의 멘토였던 학원 선생님이 들려줬던 이야기를 은희는 기억해 낸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아름답고 신기하다.”박준영 크로스컬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