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50년 전부터 사실상 전쟁 상태
그 이유는 명나라가 임진왜란 50년 전부터 일본 해적(이하 ‘왜구’)과 전쟁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나라는 가정제(嘉靖帝, 재위 기간 1521~1566년) 재위 기간에 역사상 최악의 왜구 침탈을 경험했는데, 이를 ‘가정대왜구(嘉靖大倭寇)’라고 부른다. 하필 왜 이 시기에 왜구의 침탈이 집중됐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지속되었던 바 있는데, 여러 학자들에 따르면 이 시기 왜구의 상당수는 중국 상인들이었다고 한다. 특히 스스로를 ‘해상(海商)’이라고 부른, 수백 척의 선박과 십만 명 이상의 선원을 휘하에 두었던 해적왕 ‘왕직’ 역시 중국 출신이었다. 따라서 ‘가정대왜구’는 중국과 일본의 해상세력 연합이었고, 특히 무력 부분을 일본이 담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 왜 이 사람들은 자신의 모국인 명나라를 대상으로 해적질을 했을까? 그 이유는 당시 명나라의 정책 변화에 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무역을 장려하여 7세기 이후 한반도의 여러 왕조는 물론 일본이나 동남아시아 그리고 아랍 등과의 해양 무역이 번성하였다. 그러나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洪武帝, 재위 기간 1368∼1398년)가 건국 직후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해금, 海禁)하면서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대외적으로 쇄국을 이야기한 것일 뿐 해양 무역은 암묵적으로 계속 진행되었다. 특히 영락제(永樂帝, 재위 기간 1402∼1424년) 연간에 이뤄진 정화의 대원정을 계기로 상당한 규모의 무역이 계속되었다. 수백 척의 함대가 인도양까지 탐험하고 수만 명의 군인과 상인이 여행의 경험을 공유하는 가운데 상업 네트워크가 촘촘하게 건설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정제는 이런 현실을 무시한 채, 해금 정책을 엄격하게 시행하며 수백 척의 무역 선박을 파괴하고 밀수상인들을 처형한 것이다.
해외세력의 침탈로 밀무역 금지령
가정제가 갑자기 밀무역에 대해 엄격한 통제에 나선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는데, 서양 세력이 남중국해에 나타난 것이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는 해석이 가장 유력하다. 포르투갈 함대가 남쪽에 나타나 명나라 정부에 교역을 요구하고 마카오 일대를 점령한 데다가, 전국시대(戰國時代) 일본의 지방 영주들이 중국에 교역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린 사건까지 벌어지자 전면적인 통제를 주장하던 사람들의 기세가 높아진 것이다.
무역금지 조치 이후 일시적으로 밀무역이 위축되었으나 이를 계속 억누를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포르투갈을 비롯한 해외 세력은 중국의 산물을 간절하게 원했으며, 중국 무역상들은 수십 아니 수백 년 동안 해오던 ‘생업’이 끊기자 생계를 해결할 목적으로 해적으로 변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결과 중국 동남해안은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아래의 그림에 나타난 것처럼 명나라로의 왜구 약탈은 1560년대에 절정에 달했다.
경제상황 좋았던 강남지역 약탈 집중
왜구의 침략은 명나라에 큰 문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경제력이 뛰어난 강남지방이 약탈당하면서 재정이 망가진 데다, 북방 만리장성에 정예병이 집중되어 있었기에 왜구와 맞서 싸울 군대가 제대로 조직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명나라 정부는 징집을 통해 병력을 동원했지만 이런 병사들은 왜구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물론 중국 군대는 ‘인해전술(人海戰術)’이라는 대안을 가지고 있었지만, 왜구는 일본도로 무장한 킬러들이었기에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본도는 징집병의 창이나 낫을 한번에 잘라버릴 정도로 날카로울 뿐만 아니라 잘 부러지지도 않는 탄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밀집한 명나라 군대의 한가운데에 한 명의 왜구가 뛰어드는 순간 대량학살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하나인 척계광이 등장했다. 그는 처음에는 징집병으로 이뤄진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섰다 참패를 했지만, 이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혁신을 일으킴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가 일으킨 첫 번째 혁신은 무기의 개선이었다. 날카로운 일본도를 막기 위해 병사들에게 창을 들게 했는데, 특히 창의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삼지창을 개발했다. 창은 많은 훈련을 쌓지 않아도 사용이 가능한 데다 왜구의 칼에 창날 한두 개가 잘라지더라도 얼마든지 공격을 계속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던 것이다.
척계광이 일으킨 두 번째 혁신은 ‘원앙진(鴛鴦陣)’을 개발한 것이었다. 원앙진은 수컷이 죽으면 암컷이 따라 죽는다는 원앙의 전설에서 따온 것으로, 함께 살고 함께 죽는 공동운명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원앙진은 모두 12명으로 이뤄졌는데, 왜구와 근접전을 벌일 때는 등나무 방패를 든 2명이 중심에 선 장창병을 보호하며 나머지 2명은 대나무 창의 일종인 낭선(낭선)을 사용하여 난입하는 왜구의 일본도를 막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왜구의 난입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기 개발·전법 혁신도 한몫
신무기와 새로운 전술을 채택한 후 척계광은 믿을 수 없는 연전연승을 기록했다. 이전에는 왜구들이 명나라 군대를 유인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장소에 밀집진형을 만들도록 유도하고 학살했지만, 척계광의 군대는 이를 역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승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강남지방의 지주들까지 지원에 나서며 1561년 척계광의 군대는 6000명으로 불어났고, 이후 5년간 80여 차례의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그러나 왜구의 침략이 기본적으로 무역을 원하는 상인 및 해외세력의 이해에 기반한 것이었기에 척계광의 힘만으로 전쟁을 끝낼 수 없었다. 결국 가정제가 사망한 후 1567년 황제로 등극한 융경제(隆慶帝, 재위 기간 1567~1572년)가 복건성의 장저우(漳州)항을 개방하고 해외에 나간 중국인들이 무역하고 돌아오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왜구의 침입은 끝을 맺었다.
그러나 왜구의 대대적인 침략은 명나라의 지배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 일본의 세력이 대단히 강대하다는 것, 그리고 이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대를 육성할 재원이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하게 되었다. 이 결과 장거정(張居正)의 개혁이 실행에 옮겨질 수 있었다. 그는 다양한 세목을 통합해 토지세로 단일화하는 한편 세금을 쌀과 같은 현물에서 은으로 납부하도록 했다. 조정이 자리 잡고 있는 북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치를 경우, 쌀이나 의복 등의 물자를 현물로 수송하기보다 현지의 상인에게서 구입하는 편이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은으로 세금을 내는 것을 훨씬 편하게 여긴 점도 재정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윤택해진 재정, 조선의 요청에 응하다
장거정의 재정개혁 이후 명나라의 재정은 대단히 윤택해졌다. 만력제(萬曆帝, 재위기간 1572~1620년) 때 북방을 끊임없이 침략하던 몽고제국의 엄달 칸이 명 조정에 조공(租貢)을 바치는 등 평화 무드가 조성된 것도 몽고가 필요로 하는 다양한 제품을 공급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명나라가 ‘돈으로 평화를 산’ 조약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재정개혁 및 해외교역으로 막대한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명 정부의 태창(太倉)에는 식량이 1300만 석 그리고 국고에는 600만 냥 이상의 은이 확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덕분에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파병 요청에 대응할 수 있었다. 척계광이 만들어낸 왜구 대응책, 그리고 머나먼 곳까지 군대를 보낼 수 있었던 재정 능력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대규모 파병이 가능했던 셈이다. 이런 면에서 ‘가정대왜구’는 임진왜란의 전초전이자 승패를 가른 사건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EAR리서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