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생을 마감했다. 1987년 창업자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회장직을 물려받았으니 34년간 재임한 셈이다. 그는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삼성전자를 ‘개발도상국 한국’의 독과점 기업 중 하나에서 최강의 글로벌 기업중 하나로 만들어 놓았다.
그가 삼성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추진한 전략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조직과 제품, 그리고 경영에서의 혁신이다. 그는 한국이 모방에서 혁신으로 가는 과도기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인물이다. 삼성이 개발도상국식의 ‘모방’에 머물러 있는 한 ‘영원한 2등’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인식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이런 인식은 ‘애니콜 화형식’이라 불리는 다소 극단적인 퍼포먼스로도 나타났다. 1995년 3월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 불량으로 판명난 휴대폰과 무선전화기 등 15만대, 5백억원에 달하는 제품을 불태우는 상징적인 행사가 그것이다. 화형식으로부터 25년 후 삼성전자는 구글, 애플 등과 자웅을 겨루는 글로벌 강자로 성장했다. DRAM에서 삼성전자는 44%의 점유율로 세계 최대의 시장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삼성전자의 극적인 역전 과정과 정반대의 케이스가 게임산업이다. 게임산업에서 한국은 명실공히 ‘글로벌 원 탑’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메이저 게임사들은 온라인게임의 성공에 취하면서, 그리고 압도적인 기술 경쟁력에 자만한 결과 후발자들이 추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그 결과 한국 게임사들은 직간접적으로 중국 텐센트의 영향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텐센트는 넷마블의 3대주주이고, 넷마블은 엔씨소프트의 3대주주이다. 또 텐센트는 배틀그라운드로 유명한 크래프톤의 2대주주이자 넥슨에게 로열티로 매년 1조원을 지급하고 있는 기업이기도 하다. 형태로만 본다면 텐센트는 한국 게임사의 목줄을 쥐고 있는 셈이다. 이런 역전의 과정을 평가하면 확실히 텐센트는 ‘중국의 삼성전자’로 부를 수 있다.
한국 게임사의 취약함은 기업의 철학과 비전의 부재에서도 드러난다. 전통적인 제조업 기업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와 정당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나름 치열한 노력을 했다. ‘사업보국’(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이나 ‘하나를 팔더라도 좋은 물건을 팔아서 신용을 쌓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왜 모르나’(구인회 LG그룹 창업자)라는 말이 그런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게임사들은 제조업 기업들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하는데 들인 노력 정도도 하지 않는다. 기업의 철학과 이념은 직원들을 하나의 가치로 통합한다. 철학과 비전은 기업의 조직원이 자신의 소속을 자랑스러워 하고 그 조직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게 하고, 그리고 기업의 제품이나 서비스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엔씨소프트가 자신의 가치라 주장하는, ‘물리적인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모두가 즐거움으로 연결되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는 무슨 말인지 이해조차 어렵다.
기업의 철학과 비전은 고객과 일체감을 형성하게 만들기도 한다. 적어도 과거 성장기의 게임사에서는 직원들과 유저들의 일체감이 존재했다. ‘하나의 게임을 통해 통합된 존재’라는 일체감이다. 그런데 지금은, 특히 확률형 아이템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이 들어와 유저를 ‘쥐어짜는 대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그런 일체감은 사라졌다. 게임 유저들은 극히 낮은 확률의 아이템들이 나올 때마다 자신들이 게임사의 동반자나 파트너가 아닌 매출을 위한 도구로 본다는 사실을 강하게 느낀다.
철학의 부재는 직원들의 도덕적 일탈을 가져오기도 한다. 과거에는 철학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게임의 성공에 의한 ‘대박의 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게임이 성공하더라도 창업자들이나 과실을 누리는 것이지 개발자들은 보너스 몇 번 받고 끝난다. 넥슨 등에서 게임 운영자가 희귀 아이템을 생성해 판매하거나 게임 내 정보를 외부에 유출한 사건은 바로 이런 게임사의 철학 부재가 낳은 조직균열의 산물이다.
이건희 회장이 사망한 지금, 그의 공과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하지만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삼성’이라는 조직에 대한 집착과 제품에 대한 집념이다. 한국의 게임사에 그 정도의 집념을 가진 인물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