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폐지를 잔뜩 실은 고철 손수레 한 대가 보인다. 100m가량 떨어진 거리에서도 산더미처럼 쌓인 폐지가 위태로워 보인다. 허름한 옷차림의 김명순(76·가명) 할머니는 마른 몸으로 길가의 폐지를 주워 담았다. 무거운 수레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의 주름이 깊게 팼다. 우뚝 솟은 도심의 빌딩과 김 할머니의 모습은 대조적이지만 자연스러웠다. 그에게 눈길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6일 서울 영등포구에서 만난 김 할머니에게 폐지 줍는 이유를 묻자 “어쩔 수 없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간호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며 “‘미싱’(재봉틀) 돌리는 봉제공장을 다니다가 나이들어 손을 저니까 그만 나오라고 하더라”고 했다.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자리는 거의 없다고 김 할머니는 말했다. 그는 “내가 좀 느리다. 청소 일도 알아봤는데 쉽지 않더라.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었다”면서 “자식들이 돈을 보내주긴 하는데 더 손 뻗기도 미안해 이 일을 하고 있다. 천식으로 병원에 다니고 있는데 약값도 모자라서…”라며 말을 흐렸다.
김 할머니의 단골 고물상은 8차선 대로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다른 고물상은 폐지 단가를 1kg당 20~40원 쳐주지만, 그 고물상은 10원을 더 준다. 김 할머니가 위험해도 도로를 건너야 하는 이유다. 무거운 수레를 끌다 보니 반쯤 건넜는데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었다. 성질 급한 도로 위 차들은 연신 경적을 울려댔다. 고물상에 가까스로 도착한 김 할머니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수레를 저울에 달았다. 100kg이다. 아침 6시에 나와 오후 4시까지 약 10시간 동안 김 할머니가 폐지를 주운 대가는 고작 5000원. 한 달간 꼬박 벌면 15만 원에 불과한 금액이다.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으로 지정된 노인의 경우 ‘정부의 눈’을 피해 폐지를 줍기도 한다. 노인복지법에 따라 국민기초생활수급자는 2004년부터 노인일자리지원사업에 참여할 수 없다. 2020년 1인 기준 생계급여는 52만7158원(연 632만5896원)이다. 노령기초연금을 받으면 생계 급여는 일정 부분 차감된다. 결국 50만 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다. 1인 가구 최저생계비(105만4316원)의 절반에도 못 미칠 뿐만 아니라 월세, 의료 비용 등을 지급하고 나면 턱없이 부족한 생활비다.
박병남(66·가명) 할아버지는 “기초수급자라 몰래 폐지를 줍는다”면서 “먹고살려고 폐지를 줍지만, 정부 일자리는 용돈 버는 노인들한테나 가능한 얘기”라고 했다. 박 할아버지에게 폐지 수거는 ‘들키지 않고’, ‘숨어서’ 추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실제로 A고물상 주인은 “매일 40~50명의 노인이 고물상에 들리지만, 이들 중 노인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는 분은 한 명도 없다”며 “거래 장부를 작성할 때도 신분을 따로 확인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B고물상 주인도 “노인이 직접 소득신고를 하지 않는 이상 폐지 주워 버는 소득을 알 방법이 없을 것”이라면서 “정부에서 20만 원을 보조해준다니까 집 있고 차 있는 노인들이 폐지를 주우러 나온 경우가 있다”고 귀띔했다.
서울연구원의 ‘폐지수집 여성 노인의 일과 삶’ 보고서에서 소준철 연구원은 “폐지수집은 임금노동 시장이나 공공근로 일자리에서 배제돼 있으나 빈곤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경우의 노인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며 “정책과 제도의 빈틈이 만들어낸 일종의 변종 직업”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