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증가율 0.5% 對 1.4%
히틀러가 전쟁의 세세한 부분에 참여하며 승리의 타이밍을 놓쳐버렸던 일, 그리고 미국의 참전 및 소련을 향한 군수물자 지원이 직접적인 원인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국가경제 전체의 전쟁 수행 능력, 특히 병력 부족이 독일군의 패배를 가져온 요인이라는 것 또한 무시하기 어렵다.
참고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과 동맹국의 군사력을 비교하면, 연합국(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은 4600만 명 가까이 동원한 반면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투르크 등) 군대는 2700만 명에 그쳤다. 특히 전쟁 말기에 참전한 미국을 제외한 병력 비율을 살펴봐도, 연합국 대 동맹국이 1.75대 1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주요 강대국들의 인구 비율인 1.73대 1과 거의 일치했다. 즉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이 패배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병력 부족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2차 세계대전, 특히 독소전에서 반복되었다. 20세기 초반 40년 동안 독일은 연평균 0.5%의 인구 증가율을 기록했던 반면, 소련은 내전과 공산주의로 인한 참화에도 불구하고 연평균 1.4%에 가까운 인구 증가율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반 독일의 인구는 러시아의 절반 남짓이었지만,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시점에는 격차가 더욱 벌어져 독일 인구가 소련 인구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소련은 34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대독전선에 투입한 반면, 독일의 총병력은 1300만 명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여러 지역에 분산 배치되었다. 물론 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독일은 압도적인 조직력과 혁신적인 무기를 활용해 초반에는 소련을 압도했지만, 인적자원의 손실이 누적되자 결국 공세가 중단된 데 이어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을 계기로 소련군의 반격에 밀리기 시작했다.
인종주의로 점령지서 병력 보충 안해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부족한 병력을 점령지에서 보충하면 될 일이 아닌가? 특히 소련이 우크라이나 지방을 중심으로 가혹한 수탈을 자행했기에, 소련에 대해 반감을 가진 젊은이들을 징병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당시 독일의 히틀러 정부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치는 기본적으로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믿는 인종주의자였기에,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인만 군인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열등한 슬라브인’은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되었고, 실제로 독일군은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점령지에서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전쟁에 동원 가능한 인력을 공급한다는 면만 본다면, 나치의 인구 정책은 일관적이지 못했다. 한쪽에서는 전통적인 도덕이, 다른 쪽에서는 가장 우수하다고 간주하는 인종을 번식시키려는 정책이 상존하면서 갈등을 빚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나치는 전투에 나가는 이들에게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외도를 통해서라도 자녀를 가지라”고 권장하는 한편 학살당한 주민의 유골이 가득 쌓인 우크라이나 지방에 수백만 명의 독일인을 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1차 대전 패전 막대한 배상금 부과
결국 독일은 독소전 시작 전에 이미 ‘패배’에 상당 부분 발을 담그고 있었던 셈이다. 그럼 왜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이른바 ‘전간기(戰間期)’ 동안 독일 인구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바로 경제난으로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1923년 11월 독일의 빵 한 조각 가격이 200억 라이히마르크에서 1400억 라이히마르크로 폭등하면서 독일 전역에서 식량과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약탈과 폭동이 일어났다. 화폐가치의 하락을 목격한 농민들은 지폐 대신 다른 재화를 요구하며 수확한 농작물을 팔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베를린에서는 수천 명의 시민들이 빵과 일자리를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고 길가의 상점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유대인 거주 지역에서는 눈에 띄는 대로 유대인들을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른바 하이퍼 인플레가 발생한 것이다. 참고로 하이퍼 인플레란 전달에 비해 물가가 50% 이상 오르는 일이 지속되는 현상을 말한다. 당시 독일에서 하이퍼 인플레가 발생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1차 세계대전의 패배 때문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열린 파리평화회의에서 프랑스를 비롯한 승전국이 독일에 1320억 금마르크(gold marks)라는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했는데, 이는 전쟁 전 독일 국민총생산의 3배를 뛰어넘는 액수였다. 매년 갚아야 하는 배상금 규모는 국민소득의 10%이자 전체 수출액의 80%에 이르렀기에, 신생 독일 정부는 만성적인 적자 상황에 빠져들었다.
중앙은행 발권력으로 전쟁비용 조달
물론 민간으로부터 돈을 빌려 갚아나가는 방법도 있지만, 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정부는 중앙은행의 발권력(發券力)에 의지해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국민의 신뢰를 잃은 터라 이 해결책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여기서 발권력을 동원한다는 것은 윤전기를 돌려 만들어낸 지폐로 화약이나 식료품에 대한 대가를 지불했다는 이야기다. 물론 화폐가 뿌려진 만큼 돈의 가치는 떨어져 인플레가 발생하게 된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인플레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정부가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잘 몰랐던 데다, 가격이 매우 경직적(硬直的)이었기 때문이다. 임금은 매달 혹은 매주 조정되는 게 아니라 1년에 한 번 조정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또 기업들이 가격표를 바꿔 다는 데 비용도 발생하고 혼선이 생길 수 있다고 여겨 가격 변동 요인을 즉각적으로 반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경로를 통해 독일 정부의 행동을 눈치챈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하이퍼 인플레가 시작되었다.
물론 독일에서 발생한 하이퍼 인플레가 대외 부채의 값어치를 떨어뜨린 것은 아니다. 달러나 파운드에 대한 독일 마르크 환율도 급등해 외채에 대한 상환 부담은 하이퍼 인플레 이전이나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쟁 전후 누적된 독일 국내의 모든 부채는 청산되었다. 엄청난 인플레로 인해 가격이 고정된 모든 것의 실질가치가 폭락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고정적인 연금 수입을 받아 생활하던 사람들이었으며, 독일 정부의 채권을 구매했던 사람도 대부분의 재산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반면 토지나 공장 등 실물자산을 가진 사람들이나 다른 이에게 빚을 진 사람들은 승자가 되었다.
2차 대전 발발 전까지 베이비붐 없어
경제위기가 계속되는데 출산율이 올라갈 리 없다. 특히 1차 세계대전에서 죽거나 다친 독일 젊은이들이 무려 625만 명에 이르고, 더 나아가 전쟁 이후 스페인독감이 걷잡을 수 없이 유행했던 것이 이런 추세를 더욱 강화시켰다. 물론 하이퍼 인플레가 종식된 이후 짧은 기간이지만 독일 경제가 회복되기는 했지만, 2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 이렇다 할 베이비 붐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1차 세계대전 이후의 하이퍼 인플레는 히틀러를 비롯한 전체주의 세력이 득세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1939년 시작된 2차 세계대전에 투입할 병력 부족 문제를 함께 유발한 셈이다. 전쟁의 승패 뒤에는 항상 경제 문제가 있고, 이는 비단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종종 군사력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바로 독소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AR리서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