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10월 4일 ‘스푸트니크 1호’로 옛 소련이 세계 첫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을 때 미국 언론과 과학자들은 ‘파멸적 패배’, ‘과학기술의 진주만 공격’이라고 탄식했다. 미국의 과학기술 수준을 자부해온 미국인들이 당시 겪은 충격을 ‘스푸트니크 쇼크’라고 부른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11일 과거 소련의 승리를 재현하여 러시아 국민들의 위신을 세워주려는 정치적 계산 아래 신종 바이러스 백신이 완성됐다고 발표했다. 백신 ‘스푸트니크 V’는 대통령의 딸도 접종했다고 보도됐다. 이 또한 예카테리나 2세가 1768년 천연두 백신 접종을 스스로 지원한 영웅담을 상기시키려는 의도가 담겨있는 듯하다. 일부 국내외 전문가들은 푸틴 대통령이 정치적 계산과 국위 선양을 국민의 안전보다 우선시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부작용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미 20개국 이상이 러시아 백신 구입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러시아가 ‘스푸트니크 V’를 한국에서 생산하기 위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지난주 알려졌다. 국내 2개 제약회사가 정부의 승인을 마치면 이르면 11월부터 백신 생산을 시작할 수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러시아에 질세라 미국 트럼프 대통령도 11월 3일 대통령 선거 전에 백신을 완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제2의 스푸트니크 쇼크는 없을 것이라는 미국 의학계와 과학계의 결의도 강하다. 미국과 유럽의 코로나19 백신개발은 현재 임상시험 마지막에 해당하는 3단계에 와 있다.
중국도 미국과 러시아 이상으로 백신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5월 세계보건기구(WHO) 연차총회 연설에서 “중국에서 개발된 백신은 세계의 공공재”라고 천명했다. 중국은 이미 9개의 백신 후보에 대해 임상시험을 진행해 이 중 5개 제품이 최종 임상단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 2개 회사는 연간 1억~2억 회분의 백신 생산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브라질,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러시아, 필리핀에 백신 우선 공급을 제안하고 있다.
러시아의 미하일 갈진 주일대사는 최근 일본 관청과 정가를 돌며 백신 세일즈 외교에 바쁘다는 소식도 들린다. 중국 왕이 외교부장도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외무장관과 전화를 통해 백신 개발 협력을 약속했다고 한다.
백신을 개발하고 있는 제약회사들로부터 조기에 백신을 특별히 구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얻으려는 국가 간 경쟁도 치열하다. 백신 선진국들이 후발 개도국에도 배분한다고 하지만, 자국민을 우선 접종하고 그다음에 특별구입 계약 국가에 제공하기 때문에 개도국은 백신 혜택을 누리기 어려운 구조다. 이것이 바로 백신 선진국들이 펼치는 자국 우선주의의 ‘백신 내셔널리즘’이다.
국제구호단체인 옥스팜은 최근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일부 선진국들이 코로나19 백신 예상 공급량의 절반을 이미 확보했다고 밝혔다. 옥스팜은 임상 3단계의 코로나19 백신 후보 5종에 대한 계약 내용을 분석한 결과 53억 회분의 계약 물량 중 27억 회분을 미국, 영국, 호주, 홍콩, 마카오, 일본, 스위스, 이스라엘, 유럽연합(EU) 등 선진국이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는 전 세계 인구의 13%가 백신 예상 공급량의 51%를 사들인 셈이다. 현재의 전망으로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백신을 접종하기까지 4~5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세계 각국은 코로나19 백신과 함께 코로나 항체 의약품 개발에도 급피치를 올리고 있다.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한국은 이러한 ‘백신 내셔널리즘’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백신 개발을 가속화하면서 백신 확보를 서둘러야 한다. 아울러 일본처럼 백신 보급이 늦어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감염 위험을 줄일 수 있는 대책으로서의 ‘플랜B’도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