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누리] 술과 잔의 궁합

입력 2020-08-26 17:30 수정 2020-09-1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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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교열팀장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윤흥길 소설 ‘장마’의 마지막 문장이다. 2020년 장마가 딱 이랬다. 두 달가량 거의 매일 하늘이 뚫린 듯 물폭탄이 쏟아졌다. 장마 기간이라 다들 마음의 준비를 하곤 있었지만 별나도 너무 별났다. 윗동네 아랫동네를 오르내리며 대책 없이 뿌려댔다. ‘7월 장마 8월 무더위’라는 기상학 공식도 깨졌다. 8월 중순까지 장마가 이어진 건 1987년 8월 10일 이후 30여 년 만이란다.

질기게 내리는 장맛비는 그 누구에게도 반갑지 않다. 햇볕을 쬐지 못하니 몸은 처지고 우울한 기분을 떨쳐 내기 힘들다. 장마철에 들리는 건 물난리 소식뿐. 특히 올 장마엔 “가뭄 끝은 있어도 물난 끝은 없다”라는 속담이 실감났다. 산이 무너지고 둑이 터지고,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다. ‘전남 구례 지붕 위의 소’는 2020년 장마의 상징으로 남을 게다. 다산(茶山)의 시 ‘고우탄(苦雨歎)’에는 장마철 농부들의 시름과 걱정이 애틋하게 담겨 있다. “지긋지긋 장맛비 지겹게 내려/ 밝은 해 나오지 않고 구름도 안 열리네/ 보리엔 싹이 나고 밀은 쓰러졌는데/(중략) 누운 밀 끝내 일어나지 못함을 누가 알 거나.”

이래저래 기분이 꿀꿀해 막걸리 마신 이들이 많았나 보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장마 기간 막걸리 판매량이 지난해 대비 20%가량 늘었다. 나 역시 퇴근길, 선배 혹은 친구들과의 선술집 ‘막걸리 번개’로 우울함을 날리곤 했다. 막걸릿집만 다니다 보니 술잔에 유독 관심이 갔다. 그래서 알아낸 것 하나. 술맛을 완성하는 건 술잔이다. 주당(酒黨)들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려나.

막걸리는 옹기 잔에 마셔야 맛있다. 투박한 느낌과 색감이 분위기를 띄울 뿐만 아니라 단숨에 들이켜지 않아도 시원함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물론 양푼 잔만을 고집하는 이도 있고, 와인잔에 마시는 이들도 많다. 술이 약한 사람들은 소주잔에 홀짝이기도 한다. 제각각 멋이 있다. 그런데 오래돼 색이 바랜 플라스틱 잔은 술맛을 떨어뜨려 맘에 안 든다.

술도 궁합이 맞는 잔에 마셔야 풍미를 온전히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소주는 소주잔에, 맥주는 맥주잔에, 막걸리는 대폿잔에 마셔야 한다. “대포 한잔할겨?” 참으로 친근하게 들리는 이 말은 “막걸리 마시러 가자”는 뜻이다.

궁금증이 생기겠다. 다 똑같은 잔인데 왜 대폿잔에만 ‘ㅅ’이 들어갈까? 결론부터 말하면 소주와 맥주는 한자어인데, 대포만 순우리말이기 때문이다.

사이시옷은 순우리말 혹은 순우리말과 한자어로 된 합성어 가운데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날 때 들어간다. 바닷가, 등굣길, 댓글, 모깃불, 순댓국, 배춧값 등이 해당한다. 또 나뭇잎, 잇몸, 냇물, 아랫니, 콧날처럼 뒷말의 첫소리 ‘ㄴ’, ‘ㅁ’ 앞에서 ‘ㄴ’ 소리가 덧나는 경우에도 사이시옷을 넣는다.

대폿잔은 ‘대포+잔(盞)’으로 ‘순우리말+한자’ 형태인 까닭에 ‘ㅅ’이 들어간다. 대포는 큰 술잔으로 마시는 술, 혹은 술을 별 안주 없이 큰 그릇에 따라 마시는 것을 뜻한다. 요즘엔 거의 사라졌지만 예전엔 ‘왕대폿집’이란 간판을 내건 선술집이 많았다. 지갑이 얇아도 부담 없이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켤 수 있는, 사람 냄새 나는 편안한 곳이었다.

장마와 태풍이 지나간 하늘은 유난히 파랗다. 태양도 이글거린다. 뜨거운 날들이 지나면 농촌의 들녘은 황금빛으로 물들 것이다. 논두렁에 둘러앉아 누렇게 잘 익은 들녘을 바라보며 활짝 웃는 농부의 모습을 보고 싶다. jsjy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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